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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제10화>양식복장(10)|이승만(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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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양식머리의 유행>
『1918년 11월 1차대전이 끝나자…독립을 외치고 자유를 부르짖는 일면에 붉은 사상이 굉장히 범람하고 도덕이니 인륜이니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뒤집히는 동시에 성도덕이 여지없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중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일주대로상에서 여학생들의 나체행렬이 감행되어 성해방을 부르짖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단발낭이 최초로 거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에 끌려서 나타난 사실의 한가지로는 이혼의 대유행이었다. 』
일석 이희승박사가「부부반세기」를 회고하는 글의 한 구절이다. 3·1운동이 있은 직후의 사회상을 잘 설명해 주고있어 여기에 인용한 것이다. 그때 여성의 단발머리나 남자들의 이혼 풍조는 일본 유학생들이 배워 가지고 와서 퍼뜨리는 유행이요 병이었다.
여학생의 단발은 앞서 일본이나 중국에서 선풍이 불었던 것이요, 그때까지 우리 나라 여자중학생의 대부분이 머리를 길게 땋고 있었다. 그리고 복장은 한복이나, 치마의 길이가 점점 짧아져 통치마가 됐고 1920년대 초에는 장딴지를 거슬러 무릎에까지 미쳐가고 있었다. 1921년 3월20일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미니」소동 기사가 실려 있다.『근일 여학생들의 의복이 이상하게 변하여 간다. 그 중에서도 남자의 눈에도 현저히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치마의 길이가 점점 짧아져서 근일에는 거의 무릎까지 올라가려 한다.』 롱 치마의 내력은 이화학교 첫회 졸업생인 최활란씨가 동경에서 돌아와 선보였다고 전하므로 1910년대 초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 동경에서 유행하는「히사시가미」(팜프·도어)머리에 구두를 신고 검정의 짧은 통치마를 입었는데 그것이 눈부실 만큼 최첨단의 여성「스타일」이 이었다.
「히사시가미」는 일본에 있어서 1차대전후의 개화된 머리「스타일」이다. 머리를 틀어 올리되 방석을 얹은 것같이「챙머리」라고도 했다. 이마에 햇빛을 가릴 만큼 차양을 이루어 그렇게 부른 것이며 짚방석을 틀어 올리듯 하여 「쇠똥머리」란 고약한 아름까지 붙었다. 이 머리는 앞이 잘 갈라지기 때문에 일자로 차양이 지도록 하느라고 갖은 솜씨와 애를 다 썼고 심지어 딴 머리로 방망이를 만들어 흩어지지 않게 잡아놓기도 하였다. 그래서 머리를 빗으려면 한시간도 더 허비되었다. 그리고는 머리정수리에 갸우뚱하게 큰「리번」을 달기도 하였다.
이와 흡사하게「트레머리」란 식도 있었는데, 이것은 머리를 한 가닥으로 굵게 땋아서「터번」모양 두르는 것이다. 보기는 괜찮았으나 그리 유행된「스타일」은 아니다.
1920년대에 들어서자 쇠똥머리는 쥐똥만 하게 작아져서 쥐똥머리가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7푼쯤의 옆 가르마가 유행하기 시작해 그들을「시찌부상」이라 했다. 요즘도 가정부인 중에 가끔 보는 7푼 가르마 머리는 도리어 수수하고「스포티」한 편이다.
또 머리로 귀를 덮는다고 해서「미미가꾸시」란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주로 얼굴이 긴 여성에게나 맞았다.
『머리를 말하더라도 재래「히사시가미」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에게 제일 적당하거늘 어디서 기기 괴괴한 유행을 수입하여다가 불란서 식이니「파리」식이니 하여 옆 가르마를 탄다, 양옆으로 갈라붙인다 하는 것은 무슨 어리석은 짓이뇨』역시 당시의 신문기사이다.
머리에 혁신이 일어났듯이 여학생들의 옷차림에도 부분적인 양장화 바람이 불었다. 양식제복이 없는 터에 원동(원서동)에 사는 어느 여학생이 짧은 통치마에 털실「재키트」를 입어「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치마폭에 큰 주름을 잡아 입는 것이 유행되었다. 그 주름의 층이 두 층 이상이면 굉장히 맵시내어서 입는 것이 되었다.
내가 앞단발의「오가빠」를 본 것은 l928년께다. 김팔봉씨의 아우인 조각가 김복진씨가 그런 머리「스타일」로 다녔고, 여성으로서는 화가 나혜석씨가「파리」에서 귀국할 때 그러했다고 기억한다. 그 다음「퍼먼넌트」는 1930년 말부터이다.
이러한 여성의 머리 치장의 변천에 대하여 화우 근원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글을 남기고 있다.
『요즘 돌아다니는 편발 중에는 낭자도 좋거니와「퍼머넌트」라는 놈이 꽤 마음에 든다. 그놈은 머리를 구불구불 지진 재미보다는 차라리 목덜미께다 두리두리 감아 붙인 것이 제법 그럴듯해서 한층 더 사랑스럽다. 그런데 늘 보아도 눈에 설고 얄미운 것은 고놈의 쥐똥머리이다. 쥐똥머리란 것이 25년 전 서울거리에 푸뜻푸뜻 보일 때는 정통명사가「히사시가미」였고 속칭「쇠똥머리」었다. 쇠똥을 딱 붙인 것 같아 그렇게 명명한 것인데 요즘 와서는 점점 작아져서 쥐똥에 비유하게 돼버렸다.
나이 20을 지난 방년을 여성들이 잘라놓은 무 토막처럼 싹둑 단발을 해버리는 요즘의「오가빠」들이나, 또는 간지럽게 작은 머리 쪽을 멋 부린다고 뒤통수에 딱 붙여버린 「히사시가미」도 보기에 괴로운 것이다.
하나 혜원의 풍속도를 보면 그때는 머리를 한없이 크게만 얹는 것으로써 사치를 삼고 그로 말미암아 경산하고 패륜에 이르고 심지어 생명을 버리는 일까지 있은 것은 시대가 다르고 사상이 다른 일면이 있다 치더라도 그때와 지금의 사치만 좋아하는 여성심리의 너무나 현격한 거리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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