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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제10화>양식복장(2)이승만(제자는 책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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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모던·보이 병정>
어릴 때의 기억으로 처음 양복을 본 것은 구한말의 신식 병정이다. 종래의 구식 군대가 앞자락에 퍼런 전대를 늘어뜨리고 머리에 까만 전립을 쓴데 비하여 신식 병정이야말로 뽐낼 만한 「모던·보이」의 옷차림이었다.
지금의 종로4가 동대문서 앞쯤에 있던 통안 외가에 다니러 갔을 때였다. 마침 대문 밖에서, 유량한 나팔소리와 함께 말발굽의 떼그럭 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잇달아 동네 개구쟁이들의 고함소리도 왁자지껄했다.
얼결에 대문에 매달렸지만 꼬마 동이로서는 굳게 닫힌 빗장을 뺄 수가 없고 해서 발만 동동 구르는 판이었는데 얼핏 문지방 밑의 개구멍이 문밖의 상황을 가까스로 보여주었다.
말 탄 병정들의 도도한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병정들의 옷차림이 생판 낯선 양식 군복임은 물론 앞장선 병정의 모자 위에 꽂은 꽃구마는 어찌나 신기했는지 내가 성장할 때까지 두고두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구식 군대의 초라한 복색과 축 늘어진 어깨와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되었다. 번쩍거리는 나팔(트럼펫)이며 5색의 길쭉한 삼각 기가 한결 활기를 띠어 당당해 보였다. 지금 곰곰 생각해보면 그렇게 대견할 것도 없고 오히려 너절한 편인 성싶은데 당시에는 서울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하고도 남았다. 구식 군대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킨 도화선에 이 신식 병정에 대한 질투와 불만이 적잖게 작용했다는 점을 참작해보면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피복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급료와 기타 대우에 이르기까지 월등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식 병정이란 고종 7년 (1881년)에 무위영 소속으로 신설한 별기군을 말한다. 대원군의 그 고집불통의 단단하던 쇄국정책이 외세에 밀려 병자와 강화도의 두 조약을 맺은 뒤에는 그만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 문호가 개방되자 일본 세력이 강력하게 파고들어 구 한국 정부에는 수구파와 개화파가 날카롭게 맞서 있었다.
그 틈에 개화파가 군제를 개혁하여 새로 설치한 것이 바로 별기군인 것이다.
이 신식 병정은 일본의 육군 소위 굴본 예조가 첫 교관으로 채용돼 조련하였던 까닭에 일식을 따를 밖에 없었다. 복장 역시 일본군인 그대로였다.
그 무렵 청나라 병정도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머리에 댕기 꼬랑이를 늘어뜨리고 장단 지에 발갱기를 한 청병에 견주면 참으로 거뜬하고 「샤프」한 복장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복장은 엄밀히 따지면 「프랑스」식 군복이다. 일본에 있어서의 개화는 우리보다 수십 년 앞선 데 불과하고 따라서 그들의 양식화란 몸에 밸 겨를이 없어 아주 어설픈 것이었다. 그들은 개화 초기부터 「프랑스」식 문물을 많이 본뜬 데 불과한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그것이 곧 일본 것인 줄만 여겨 별기군에 대해 항간에서는 왜 별기라 불렀다.
별기군이 창설되고 처음에는 서대문 밖의 모화관을 교련 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하도감-현 을지로6가로 옮겼다. 내가 통안 외가에서 구경한 신식 병정의 행진은 그 하도감 병사에서 창덕궁으로 향하는 기마병이었던 것 같다.
별기군은 말하자면 궁 지기 시위 병이다. 고종 황제는 이 별기군에 대하여 여간 관심이 크지 않았고 구식 군대의 급료를 1년 이상 주지 못하는 형편이었음에도 별기군에만은 은총이 각별하였다. 고종은 때때로 별기군을 불러 궁 안 뜰에서 조련하는 광경을 보며 즐겼다.
별기군 중에서도 한층 거드름을 피운 것은 기마병이었다. 군복은 심 녹색인데 소매부리와 바지 곬에 붉은 줄을 치고, 견장과 모자에는 금사를 칭칭 둘렀다. 상의 앞면은 두 줄로 7개씩의 쇠단추가 달리고 그 「더블·버튼」 사이에 줄을 늘여 훨씬 가슴이 떡 벌어져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일반 병정의 상의는 도련이 둥그렇게 파여서 활동에 간편하지만 장교복은 단정하게 앞자락을 여며 아주 품위 있는 옷매무새였다.
특히 장교의 모자는 지금도 「프랑스」 장교가 쓰는 그것이다. 「드골」의 군복 사진을 볼적 마다 어릴 때 별기군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모자가 온통 금테 투성이인데 지휘관쯤 되면 「사포」-깃털을 높이 세운 꽃구마가 하늘거려 얼굴까지 돋보였다. 그것은 정장 의관이었을 게다. 보병의 옷 빛깔은 누런 것이어서 결코 호사롭달 것이 못되었다. 심지어 순검이 검은 군복을 착용하고 바지 곬에 흰줄을 친 뒤에는 그만도 못하여 더욱 시세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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