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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제자는 필자>|<제9화>우정 80년(6)|강직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우표 (상)>
『…「스탬프」를 찍을 수 있을만한 크기의 종이를 이용하여 그 뒤 면에 부착성 있는 도료를 발라 편지 앞면에 붙일 수도 있읍니다.』
세계 우편의 창시자 영국의 「로랜드·힐」경이 영국 의회에서 요금 선불을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 방법의 하나로 우표를 사용하면 된다고 답변한 대목이다.
영국에서 1840년5월6일 세계 최초의 두가지 우표가 발행된 이래 각국은 저마다 우표를 발행, 현재 20여만 종 우표가 나왔으며 거의 매일같이 새 우표가 찍혀 나오고 있다.
우정 총국이 생긴이래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우표가 발행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찍어오고 다음에는 미국에서, 다시 프랑스에서 찍어오는 등 우리 우표에는 구한말 물밀듯 다가온 외세의 손길과 선각자들의 자주 독립을 위한 몸부림이 굽이굽이 얽혀있다.
구한말 문위우표·태극우표·이화우표를 살펴보자. 우리 나라 최초의 우표는 문위 우표다. 1884년 선각자 홍영식 선생의 힘으로 창설된 우정 충국의 개설과 함께 우리 나라에도 처음으로 우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문위 우표는 5문, 10문, 25문, 50문, 1백문 등 5가지 종류였다. 이 우표는 당시 한국 해관 (세관)에 고빙된 「묄렌돌프」(목린덕) 의 수원인 「하스」가 상해 주재 일본 영사 「시나가와」(품천)에게 제조 가능성을 조회,「시나가와」는 일본 외무성에 이첩하여 일본에서 찍어오게 되었다.
문위 우표의 원도는 태극기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이때 그린 태극기모양이 현재 국기와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극기의 양식은 그 후 우표나 기타 문헌에 각양각색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보내온 우표는 한국 측이 제시한 이와 같은 원도는 많이 개안되었다. 문위 우표 중 5문짜리와 10문짜리는 일부가 우정 총국 개국 전에 도착했기 때문에 일부 사용되어 사용 필 우표가 전해지고 있지만 나머지 것은 우정 총국이 없어진 다음 해인 1885년3월에 도착함으로써 실제로 사용되지 못했다. 발견된 문위 우표는 8장으로 국내 소장품으로서는 진기홍씨가 갖고 있는 5문짜리 한 장일 뿐 나머지는 외국인이 갖고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국인 「노먼·타운센드」씨와 「헬렌·지클」여사가 5문짜리를 각각 1장씩 갖고 있으며 그 밖에 미국에 10문짜리 l장, 일본에 5문짜리 2장, 10문짜리 2장이 있다 한다.
문위 우표의 시중 유출 경위에 대해 5문짜리와 10문짜리는 극히 일부가 사용된 외에 일부는 난리 통에 약탈되었거나 흩어진 것으로 보며 다른 종류는 세창양행에 불하되었음이 최근에 밝혀진바 있다. 문위 우표의 인쇄 수량은 5문짜리 50만장, 10문짜리 1백만장, 25문짜리 50만장, 50문짜리 50만장, 1백문짜리 30만장 등 모두 2백80만장이었다.
1895년7월22일 농상공부에 통신국을 두고 우편 업무가 재개되면서 찍어낸 우표가 태극우표다. 이 우표는 5푼, 10푼, 25푼, 50푼의 4가지였다.
중앙에 태극기가 있고 네귀에 이화를 그려 넣었다. 이 우표는 전우총국 회판으로 임명되었던 미국인 구례 (「그레이트·하우스」)의 알선으로 미국「앤드루·B·그레이엄」조폐 회사에서 찍어 왔는데 모두 8백만장이었다.
태극 우표에 박힌 국명은 「죠션우표」 (조선우표) 로 되어 문위 우표에서 보던 대조선의 대자가 빠졌고 표침 대신 표표라고 썼다. 대자가 빠진 것은 당시 중국의 압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나 표자의 사용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해석이 없다.
이 우표의 초기 소인 우표가 극히 희귀한 편인데 얼마전까지만해도 황우상씨가 갖고 있는 1895년6월23일 (음력) 한성우체사 일부인이 찍힌 5푼짜리가 최고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진기홍씨가 1895년6월1일 (음력) 태극 우표의 발행 초일 인천우체사 소인 5푼짜리를 발견했다. 1897년10월 조선국을 대한 제국으로 개칭하는 정체 개혁이 있은 후 우표 면의 조선을 대한으로 고치기 위해 목각인으로 「되한」이나 「대한」으로 가쇄 한 것이 이른바 대한가쇄 우표다. 1900년1월6일 칙령으로 국내 우체 규칙이 개정, 신문 우편 요금을 종전의 최저 요금 5푼에서 2리로 인하했고 요금을 후불하는 요금 약수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에 쓰일 2리 우표를 새로 발행할 때까지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태극 우표 5푼, 25푼에 1푼 (2리 상당)으로 개정 발행한 것은 소위 「일자 첨쇄」우표다.
우리 정부는 1896년 우표를 국내에서 찍기 위해 7천2백원을 들여 독일제 인쇄기를 발주, l899년에 들여왔다. 2리에서 2원까지 이르는 14종의 이 우표는 이화와 태극이 주도안을 이루고 당초 모양을 배합한 섬세한 것으로 원도는 지창한이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우표는 우리 나라 고급 인쇄 최초 작품으로 인쇄 문화 사상 기념할만한 것이다. 한가지 흥미있는 일은 이 우표를 시쇄할 때에는 이화 대신 무궁화를 썼다는 것이다. 무궁화가 언제 국화로 되었는지 모르는 이 마당에 왕가의 문장이 이화 대신 무궁화가 한때 인쇄되었다는 것은 국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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