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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기능에 새 학설|일 중산무 박사와 전상운 교수의 견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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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라 첨성대의 관측 용도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 과학 사학자들에 의하여 제시됐다. 현존 천문대로서는 동양 최고인 첨성대의 과학사적인 답사를 위하여 30일 이곳에 온 동양 천문학사의 세계적 권위인 일본의 중산무 박사 (동경대 교수)와 한국 과학 사학자 전상운 교수 (성신여사대)는 면밀한 검토 끝에 당시 신라 사람들이 첨성대 안으로 오르내리면서 천체를 관측했을 것이라는 사학자들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밖에서 관측하는 규표로서의 비중이 크다는 의견에 기울었다.
첨성대의 관측 방법에 관하여 당장에 어떤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고 전제한 중산 교수는 첨성대가 동양의 어느 천문대보다도 예술적인 조형미를 갖추었다고 즉석에서 극찬했다.
현재까지 첨성대의 기능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즉 맨위 정자석 위에 목조 건물을 세워 혼천의를 설치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속에서 뚫린 천장을 통하여 관측하는 개방식 「돔」으로 보는 견해다.
이번에 두 교수가 새로 등장시킨 규표에 대한 해석은 실은 전 교수의 견해였던 것을 이번에 중산 교수가 검토, 확인한 것으로 결정적인 결론은 몇 가지 미흡한 점 때문에 얻지 못하고 있다.
규표의 기원은 주대 (기원전 1천1백년)의 것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당대 (8세기) 원대 (12세기) 명대 (16세기) 의 것으로 명맥이 계승됐는데 첨성대는 당대의 것보다 76년 전에 세워졌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양에서 제일 오래됐다.
당의 주공측경대는 바로 주초의 무왕 동생인 주공이 해 그림자를 재기 위하여 세웠던 측경대의 전통을 계승한 높이 3·86m 의 사다리꼴 위에 4각주를 세워놓은 탑 모양인데 첨성대의 곡선 형식을 직선으로 고쳐 그리면 바로 측경대와 같은 모양이 된다. 즉 신라 사람들은 중국의 것을 받아들이되 한국 고유의 곡선을 가미하여 내 것으로 세웠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의 규표와 함께 백제의 천문대, 백제 천문 학자의 지도 아래 세워진 일본의 첨성대, 신라의 첨성대는 모두 형식상 공통점을 가졌다.
첨성대는 외관이 안정되고 우아한 구조로 석재도 잘 다듬어졌지만 내부는 자연석 그대로다. 이점에서 개방식 「돔」으로 내부에서 관측했다면 너무 조잡하고 오르내리기 불편하게 되었다. 더우기 남창은 1변이 1m 정도의 창으로 사다리를 놓고 매일 드나들기에는 불편하다. 27단 내부의 반원 위치에 석판이 깔려있고 그 옆에 목판을 깔아놓았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으나 이곳에 누워 관측할 경우 고작 혜성이나 유성의 관측밖에 안되며 이것은 지상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천문대를 놓을 필요가 없다.
혼천의를 위에 놓고 관측한다면 고정된 석재 시설이 필요했을 것이나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아 목재의 입시 시설을 가설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비상 현상 즉 일월식·성변 등을 관측할 때만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정상부에 관측자가 올라가는 천문대는 대개 돌계단이 함께 축조되었던 점으로 보아 임시적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증보문헌비고』상위고에 의하면 선덕 여왕 16년 (647년) 에 건립되었으며 사람이 아래위로 오르내리면서 천체를 관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구조로 보아 두 교수는 관측기용과 개방식 돔의 기능을 임시적인 용도를 위한 것으로 보고, 통상 관측은 규표로서의 기능면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것. 즉 첨성대는 다목적이며 신라 천문의 「상징적인 탑」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다.
첨성대는 규표로서 흥미로운 구조를 가졌다. 사방 동일 구조로 계절과 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측정이 가능하며 춘·추분점 및 동·하지점의 관측과 4계·24 절기를 확정해 역법을 산출했다.
춘분과 추분에만 남창을 통하여 입사한 태양 광선이 내부 바닥에 비친다.
또한 중산 교수는 첨성대의 퇴락이 극심하여 보수 문제가 더 급할 것이라고 했다. 보수 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길 일이나 첨성대를 이전하자는 의견이 있었던 것을 상기하면서 위치만은 현재의 자리에 두어 차라리 복원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했다.
천문대는 필연적인 위치 선정에 의하여 건립되며 성좌의 관측에 절대적이므로 당시의 천문학적인 이해와 의의를 살리기 위해서다. 첨성대는 신라 천문 관측의 자오선 격인 원점이며 동시에 상징이었다는 전 교수의 해석에 의견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첨성대는 현재 북으로 심히 기울어졌으며 해마다 경사를 더해 가고 있다. 특히 아래 서북쪽은 돌 틈이 크게 벌어졌고 상부 동북쪽 제4단 째는 돌이 더 튀어 나 왔다. 또한 맨 위 정자석이 북쪽으로 밀려나 불안정하다.
1천3백여년 묵은 화강암을 다루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므로 전문가를 해외에 파견, 훈련해서라도 그 보전에 힘쓸 것이 아쉽다고 했다. 특히 천문대 하나 없는 우리로서는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경주=김현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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