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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3) |광복지사의 망명처 법장사와 교포주지|대북=이종호 순회특파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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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00년대 초엽 한국의 한 선각자가 대만에 세운 절이 일제시 망명 한국인의 피난처 겸 중국 국민당 비밀당원들의 「아지트」로 이용되었던 사실이 뒤 늦게야 밝혀졌다. 대북시에서 약 4km 떨어진 대북현 북투산 중턱에 자리잡은 법 장사가 바로 그것.
이 절은 1910년을 전후하여 신의주 용산동 출신 한재룡씨(1944년 10월에 작고, 생존해 있으면 93세)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 한씨는 1903년 동료 2명과 함께 대만에 이주해 왔다. 당시 한씨의 나이는25세. 2년 후 결혼, 그의 미망인 진소(87)할머니는 현재 이곳에 살고 있다.
1948년에 증축되었기 때문에 유골안치소인 「장엄주지」만 그대로일 뿐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한씨의 외손녀인 일본 불교대학원 출신 혜광스님(42세)이 주지로서 관리를 맡고 있다. 현재 대만화 3천만 원(2억 4천만 원) 규모의 재단을 이루어 비구니 약 40명이 이곳에서 불도를 닦고 있다.
진할머니는 한씨와 더불어 절터를 찾으러 대북 근방의 산을 헤매던 이야기며, 신사봉안거부로 겪었던 일제로부터의 고초를 감회 어린 얼굴로 엊그제의 일인 듯 생생하게 들려줬다.
1917년 33세 때 약 4개월간 한국에 다녀왔다는 진할머니는 신의주 소식을 모르면서 한국어로 『좋습니다』하면서 말을 이었다.
지을 때만 해도 가파른 산중턱의 외딴 절이었으나 1895년 청일전쟁으로 대만을 할양받은 일본이 총독정치를 펴면서 차차 북투산에 산장들을 짓는 바람에 지금은 절의 발 밑까지 일본식의 낡은 건물들이 꽉 들어차 속세와 떨어진 느낌은 주지 않는다.
슬하의 1남1여 중 아들 한봉문씨(56)는 대만에서 금은방을 경영하며 재산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절은 딸이 물려 받았다. 진할머니는 남편의 작고 후 37년간 줄곧 절에서 떠나지 않고 남편의 영전에 불공을 드리고 있다.
1947년 대만원주민과 국 부군 사이에 2천7백여 명의 희생자가 난 대 충돌사건이 일어났을 때 원주민으로 오인 받은 장채용씨(신의주출신)와 박모씨(통영출신)가 뒷산에 끌려가 국 부군에 의해 살해당한 것은 가장 뼈아픈 기억이라고 했다.
현재 이 절엔 한씨를 포함한 5명의 한인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또 이곳이 중국 국민당 비밀당원의 「아지트」였던 것이 인연이 되어 장총통이 이례적으로 이 절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씨가 작고 당시교민회 총무이사였던 길영빈씨(64·평북태생·현 대북시 안동가에 거주)에 의하면 이 절은 나라를 잃고 외지에서 감시 받던 한국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고 회상한다.
당시 대만에서의 일본의 학정은 한국에서보다 심해 원주민에겐 일체 공직을 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하찮은 순사보까지도 성분 조사를 거쳐 고용형식으로 채용했다고 한다. 당시일 본인 세탁소의 주문원이었던 조명하씨(당시 19세)가 역에 내린 일본 황족에게 단도를 던져 사형을 당한 사건을 계기로 재대 한국인에 대한 전반적인 대우로 더욱 악화되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에 대한 감시는 한국인 한 사람에게 일본고등계 형사가 한 사람씩 붙어 다닐 정도로 심했다고 한다.
길씨는 평양에서 사상범으로 몰려 대만으로 도망 온 후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고 땅 장사로 지내기도 했지만 1943년 「맥아더」 사령부가 공중 살포한 조국광복 가능성을 알리는 전단을 주워 보고 한씨와 더불어 춤을 췄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 전단을 품고 평양으로 돌아가 숭인중학교 교감을 지낸 은사 김취선씨(당시YMCA총무)와 친구 황경한 목사(현재 서울 효자동 거주) 등에게 독립의 가능성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49년 귀국하여 6·25동란을 서울에서 겪은 것을 제외하곤 지금까지 줄곧 대만과 한국을 왕래하며 살아온 길씨는 대만 광복기념일인 10월 25일에는 한국인대표로 한복을 입고 식장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밖에도 49년 귀국직후 대만으로부터 약 2만 톤의 유연탄을 수입, 정부에 납품, 미군정으로부터 무역허가 84호를 받아 계속 「바나나」 등의 수출입업무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에는 한국의 문화영화를 대만으로 수입, 대만 교육TV에 약 40 편을 소개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외화수입「코터」를 얻어 서울로 외화도 수입했다.
그가 대만에 소개한 주요 문화영화는「역도산의 일생」, 「연날리기」, 「원양어업」, 「가요 50년사」(줄거리는 직접 집필), 고적소개 등이다. 한때 한국의 문화영화를 1백20분이나 무료로 방영한 적도 있었고, 최근에는 1백 10편의 위촉장을 대만 교육TV로부터 받고 있지만 한국의 외화 수입규제법이 변경(100%「링크」에서 0.04%로 하락), 기업성이 없어져 개인으로선 재력의 부족으로 감당하기 힘든 것을 아쉬워했다.
한때 폐결핵과 일경에 의한 고문으로 몸이 상한 데다 현재는 위장병이 도져 요양 중이기 때문에 길씨는 3년 전에 대만에 온 후 귀국하지 못하고 작년엔 서울의 정능에 살던 가족마저 대북으로 이주시켰다. 길씨는 지금까지 자기 나름대로 지켜 온 애국충정이 결국은 법장사를 지은 조씨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고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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