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02)제7화 양식반세기(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미장 「그릴」 시절>
해방 후 서울엔 미국 물결이 쏟아져 흘러들었지만 양식집은 그리 많지 않았고 「쿠크」의 얼굴도 빤했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산다. 그러나 건강하게 살기 위해 현명하게 먹어야한다. 그러므로 영양가를 최선의 방법으로 육체에 흡수시키는 것이 「쿠크」의 최대임무다. 생존해있는 「쿠크」로 최고참인 윤성모씨(67)는 『요리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외국에선 「쿠킹」(요리)Ph·D(박사)과정도 있을 정도다. 『우리식당은 외과의사가 수술하러 들어갈 때와 같이 깨끗이 소독한 손으로 요리한다』고 써붙인 외국 「레스토랑」도 있지만 주방은 외인출입이 금지된 신성불가침 지역으로 정결한 분위기 속에서 맛있는 음식이 요리된다.
그러기에 흰 두건을 쓴 「유니폼」은 정결과 봉사의 상징이다. 「쿠크」가 되려면 접시 닦기 1년, 야채 닦기와 감자 벗기기 3년, 그리고 요리 담아내기와 「메뉴」익히기를 합한다면 10년 공을 들여야한다. 양식을 계몽해서 팔아먹던 시설이 있었던가하면 해방 후 급증하는 양식인구의 수요에 따라갈 참다운 양식의 공급이 아쉬웠다.
고객 중에도 조병옥 박사 같은 이는 양식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아 보통 사람들이 버리는 「로스토·비프」의 탄쪽을 벗겨달라고 주문하는가하면 장택상씨는 여름엔 얼음에 채웠다 꺼낸 「콜드·미트」(cold meat)를 꼭 찾았다. 동산선생(윤치영씨)은 「메뉴」를 척보고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게 있군. 「베이키드·빈스」(baked beans)말야』라고 주문하곤 했다.
「베이키드·빈즈」(콩을 익힌 것)를 보고 어떤 고객은 양식집에서 메주를 끓여 판다고 했는데 제대로 주인을 만날 땐 기쁘기 한량없었다. 노련한 「웨이터」들은 명사들의 식성, 고기야채의 선택까지 완전 「마스터」하여 묻지 않아도 척척 주방과 연결이 되기 마련이다.
고 마해송씨 같은 이는 해방전 일본서 문예춘추편집장, 「모던·일본」사장 등을 지내는 동안 양식과 여송연과 양주를 그의 입에서 떼지 않아 교포 중에 가장 화려한 생활을 누렸다고 알려졌는데 해방이 되자 『내 나라를 찾았으니 일본엔 안간다』고 버티며 백양담배와 소주를 마셨다.
마씨가 신태양지에 연재한 식도락이란 글이 있었는데 「비프·스테이크」란 것이 「웨이터」의 구두창보다 질겨서야 먹겠는가. 칼로 썰면 빨간 피가 살짝 솟을락말락해야지』라고 일본의 양식을 비판했는데 그 기사는 우리 양식종사자들에게 교훈을 줬다고 본다. 「쿠크」장은 아침 일찍 시장조사를 한 뒤 「코피」 한잔을 마시면서 그날의 「메뉴」를 짠다. 생선이 성한지 고기가 연한지는 눈으로 당장 알아본다. 오래된 「쿠크」는 기름덩이를 봐도 소골에서 나온 기름인가 곱창에서 얻은 기름인가를 알아 맞춘다.
이조 때부터 쌀은 여주·이천쌀, 고기는 양주소를 으뜸으로 쳤는데 먹이관계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양주소는 고기가 연백하고 살이 쪄 노련한 「쿠크」는 빛깔로 판단해 버린다. 구어 놓은 「스테이크」가 구은지 몇 분된 것까지 알아 맞춘다. 왜정 때 충무로에서 3대째 정육점을 한 「구로가와」(흑천)는 어느 지방 소, 몇살 먹은 몇근짜리, 무슨 빛깔로 배달하라면, 24시간 안에 대령하곤했다. 암소고기를 구별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궁중에선 특히 유별나 윤비가 생존했을 때 홍붕표 요리담당관은 산란직전의 살찐 도미를 찾아 수산시장을 헤매곤 했었다. 도미 중에서도 암도미, 암도미 중에서도 1자8치 이상짜리라야 통과됐었다.
해방 후엔 「오일·버너」니 「오븐」(요리 굽는 난로)이 없어 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해 화덕에 넣어 분무질을 했었다. 이승만 박사는 「쿠키」를 좋아해 이같이 화덕에 구은 「쿠키」를 야식으로 시켜다 들곤했다. 1946년 봄 주한미국대사 「존·J·무초」씨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다. 미국 「펜터건」(국방성)에서 육군대학졸업생 60여명에게 38선 시찰을 시키는데 좋은 음식을 대접해 보내야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대사관 공보관 「제임즈·스튜어드」씨와 국제문화협회 김을한씨가 부리나케 창덕궁에 들어가 굳게 닫힌 궁문을 두드렸다. 이왕이면 「라일락」 향기가 그윽한 비원에서 구황실 집기를 사용하여 맛있는 양식을 맛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상감마마가 쓰던 인정전에서 「프랑스」식으로 본 때있는 양식을 차려놓고 『이것이 고종이 잡숫던 양식이다』고 설명하자 이 고급장교 일행은 「원더풀」을 연발하면서 『본국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요리는 먹어본 적이 없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것이 해방 후 궁궐에서 베푼, 첫 「파티」인데, 「스튜어드」씨는 후일에까지 그때 양식 먹던 추억담을 술회하고 있다. 미군정 때는 비원에서 「파티」가 열린다하면 대사관에 전화한마디로 각종 양주가 「트럭」으로 실려왔지만 요리시설이 엉망이어서 쩔쩔맸다.
손이 모자라 미장「그릴」요리「팀」이 늘 도맡다시피 했는데 우리 나라 경찰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B모대령(미국인)의 송별회를 조병옥 경무부장이 주최하는데 손이 모자라 당시 숙대가사과 학생전원을 총동원, 고기 써는데만 이틀 밤을 새운 일이 기억에 새롭다. <계속> [제자는 필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