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2)<제6화>창군전후(11)이경석(필자는 제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하극상>
경비대의 초창기에는 갖가지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 중에도 사병들이 장교를 구타하거나 배척한 이른바 하극상사건이 많았으며 한국장교와 미군간의 충돌도 적지 않았다.
제3연대장 김백일 정위는 임지인 이리에서 결혼했다. 이른바 제3연대장 배척사건은 이 결혼식이 너무 화려했다는데서 발단됐다. 김백일의 결혼식이 당시 비용으로 1백50만원이었다는 소문의 퍼지자 고급 하사관들은 보급품인 C·레이션을 부정 처분해서 결혼한 것이라고 주장, 연대장을 규탄했다.
당시 사병들의 주·부식은 좋지 않았다. 때때로 강냉이밥을 먹었고 간간이 C·레이션이 보급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레이션이 지급되지 않았었다. 사병들은 레이션이 지급되지 않은 이유가 연대장 부정처분 때문이라고 여겼다. 연대본부의 상사단과 군산에 있던 제2대대가 주동이 되어 『연대장은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군산에 주둔한 2대대는 이리의 연대를 이리의 연대본부까지 24㎞를 강행군하여 완전무장을 한 채로 연병장에서 『레이션을 부정 처분하여 결혼식을 한 것이 아니냐』, 『주·부식이 나쁜데 예산을 횡령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규탄하면서 소란을 피웠다.
김백일 연대장은 이런 소란 속에 나타나 해명하려했으나 흥분한 사병들이 『듣기 싫다. 물러가라』고 외쳐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 일로 김백일 정위는 연대장 직에서 물러서고 새로 임관한 송호성 참령(전 광복군 지대장)이 부임했으니 사병들의 요구는 관철된 셈이었다. 8연대3대대장이던 송요찬대위는 부하들로부터 구타당한 일이 있다. 송 대대장은 강력한 대대로 육성하기 위해 3개월간의 신병훈련을 밤9시까지 강행하였다. 이 교육기간 중에는 장병을 막론하고 외출이 금지되었다. 이 통에 먼 고향에서 면회를 와도 철조망 밖에서 훈련하는 모습만 보다가 되돌아가야만 했다.
이 3대대는 강릉에 주둔해있었는데 사건의 발단은 김진위 소위(예비역 소장)의 결혼식에 나갔던 박인욱·홍민규 상사 등을 「무단외출」이라 하여 영창에 넣고 강등시킨 데 있었다.
이 같은 조치에 불평과 불만이 대대 안에 가득 차자 대대장은 이를 무마하려고 회식을 베풀고 술을 마시게 했다. 한사람에게 청주3홉씩이 배당되었다. 그러나 회식의 술기운으로 하사관과 사병들은 대대장실로 몰려가 거구인 송 대위에게 전구 등으로 폭행을 가하고 병기고를 파괴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강릉주둔 미군의 출동으로 난동은 진압되었는데 사건 후 주동자의 배후를 조사한 결과 그들이 남로당의 조종을 받고 있음이 드러났다.
6연대에서도 김영환 중대장이 불순분자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하극상사건은 이밖에도 여기저기서 발생했다.
또 경비대는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는데 제4연대의 영암사건은 대표적이다. 경비대가 창설될 때 경찰보조기관으로 간주된 것이 경비대와 경찰간의 마찰을 가져온 근원이었다. 미군정에서는 경찰우위정책이었다.
그 예로 경찰에는 새로운 제복과 카빈이 지급되었으나 경비대는 일본군복 그대로였고 무기도 일본군의 「구구」식 혹은 「삼팔」식 소총이었다.
영암사건은 그 관내의 한 지서에서 일어난 군·경비들과 이 사건을 조사하러간 경비대 군기사병에 대한 경찰의 구타로 발단되었다. 평소에 경찰의 태도를 불손히 여겨온 장병들은 동료가 경찰한테서 구타당했다는 소식에 흥분, 3백여 장병이 7대의 차량으로 영암경찰서를 습격, 사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의 4연대장은 이한림 소령.
그는 이 보고를 듣고 뒤늦게 영암서로 달려가 사격중지를 명령했으나 경찰에서는 연대장을 목표로 수류탄을 던져 연대장호위병 한명이 죽고 한명이 부상했다.
한편 이 무렵 전남도경의 경찰기동대는 군사영어학교 출신의 정내혁이 지휘하고 있었다. 정내혁은 소위로 임관하여 이한림과 같이 3연대에 배속되었다가 미 고문관과의 의견충돌로그가 원래 소속했던 경찰의 경감으로 복귀했던 것이다(정은 그후 제7기 특별로 다시 군에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두 지휘관의 이런 관계로 해서 사건은 쉽게 가라앉았지만 하마터면 얼마전의 동지들끼리 일전 대결을 벌일 뻔했다.
경비대와 미군간에는 대개 지휘권문제로 다툼이 많았다. 초기에는 각 부대장에 미군과 한국인이 같이 임명되었다. 국방경비대의 초대사령관은 마셜 중령과 원용덕 참령이었고 2대는 미군의 베로스 대령과 한국군의 이형근 참령이었다. 이 참령은 사령관대리로 부임되었는데 직위야 대리지만 사령관 권한을 행사하다가 베로스와 자주 충돌하여 두 사람이 모두 그 직에서 물러나고야 말았다.
제1연대의 채병덕 대대장은 미군대대장이던 마셜이 중령의 간섭을 받고 군복을 벗어 던지며 그만 두겠다고 한일이 있으며 제2연대의 최홍희대대장도 미군대대장이던 카폰 중위와 크게 싸운 일이 있다.
최홍희 대대장이 연대본부를 대전비행장에서 시내로 옮긴데 대해 카폰은 몹시 못마땅해했다. 카폰은 최홍희를 그의 숙소로 불러 권총을 빼들고 『왜 병사를 맘대로 옮기느냐. 원위치로 복귀하라』고 협박했다. 최홍희는 권총을 빼들고 있는데 분개하여 『고문관이 왜 협박하느냐』고 대들었다. 카폰 중위는 최 부위가 부하들에게 태권도 가르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오히려 겁을 먹고 『권총은 협박하려던 것이 아니고 분해소제를 하려던 참이다』고 변명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