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글날이 부끄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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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567주년을 맞는 올해 한글날은 유난히 뜻깊다. 한글에 대한 국제적 위상을 고려해 23년 만에 다시 공휴일로 지정해 맞이하는 첫 한글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우리말과 이를 담는 한글이 왜 민족적 자긍심의 상징이 됐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우리 말글에 대한 사랑을 되새기는 날이 됐으면 한다.

 우리 말글은 이젠 한 나라의 언어 수준을 넘어선다. 전 세계에서 7900만 명이 모국어로 사용하는 거대 언어일 뿐 아니라 국제화와 교역·교류·이주민 증가로 이를 배우는 외국인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에게 우리 말글을 가르치는 세종학당은 이제 51개국 117개소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누리집 ‘누리-세종학당(www.sejonghakdang.org)’을 이용하면 11개국 언어로 우리 말글을 배울 수 있다. 우리 말글은 바야흐로 국제화 시대를 맞고 있다.

 문제는 우리 말글이 이런 위상에 걸맞을 정도로 정확하게 사용되고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있느냐다. 오히려 디지털과 국제화 시대의 영향으로 우리 말글의 훼손이 심각한 수준이라며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입말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험악한 욕설을 입에 담는 일이 사회문제가 됐다. 글쓰기에선 어법·맞춤법·띄어쓰기가 엉망인 문장이 줄지 않는다. 본지 기획보도에 따르면 특히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만연한 그릇된 우리말 사용이 일상 언어생활까지 침투해 ‘꿰매다’를 ‘꼬매다’ 등으로 틀리게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한자를 제대로 몰라 ‘소인배’에 대응하는 말이 어느 샌가 ‘군자’ 대신 ‘대인배’라는 황당한 신조어로 바뀌기도 했다. 일부 서비스 분야에선 “식사 나오셨습니다” 등 사물에 대한 높임말이 난무한다. 이는 어법에 맞지 않다. 디지털화와 국제화에 따라 밀려드는 외국어를 대체할 우리말을 찾거나 만들지 못하고 그대로 쓰는 경우도 갈수록 늘고 있다.

 이는 국어 교육의 위기를 넘어 우리 말글 자체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용이 필수적이다. 언어의 혼란은 소통과 지식의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우리 말글을 정확하게 쓰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은 겨레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말 지킴이들의 활약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일부 동호회 카페 등에서 올리는 글에 띄어쓰기·오타·맞춤법에 책임감을 요구하는 게시판 클린캠페인은 고무적이다. 국립국어원 누리집에서 운영하는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 난에는 수많은 누리꾼이 의견을 제시해 외국어를 우리말로 다듬고 있다. 디지털과 국제화 시대에 우리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할 일은 이처럼 우리 말글을 품격 있는 언어로 함께 가꿔가는 일이다. 이번 한글날을 그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