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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6화-창군전후(1)이경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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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관학교의후예>
구한말 군대 해산령이 내린 것은 1907년7월. 이때 한국무관학교에는 지청천·이응준·김석원 등 40여명이 재학하고있었다. 군대 해산령에 따라 무관학교의 문도 닫혀져 재학생 40여명은 1908년 가을 동경 육군 중앙유년학교로 유학하게 됐다.
당시 제도로는 유년학교 3년을 거쳐 군부대에서 6개월간 실습한 후 다시 본과에 들어가 2년간 군사학을 연수하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을 모두마치고 귀국하면 대한제국의 무관으로 임용되어 영광된 앞길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이 유년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한일합방이란 또 하나의 비운이 불어닥쳐 유학생이 아닌 일반학생으로 전환됐고 이들은 결국사관학교 26기와 27기생으로 졸업하게 됐다.
26기에는 이미 작고한 지석규·홍사익·신태영·김준원·유승렬·박승훈·안병범·조철호·권령한·염창섭·안종인과 생존해있는 이응준(현 반공연맹이사장)·이대영(예비역준장) 등이 있었고 27기생은 김석원(현 성남중고이사장)·장석윤·백홍석·김인욱·김종식·김중규·윤상필·장기형·장성환·장유근·정대·이희겸·이강자·이종혁·이동훈·박창하·유관희 등이다.
합방소식에 20전후의 활기찬 유학생들은 비분 강개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유학생 다수가 요꼬하마에 가서 대호통음한 끝에 이구동성으로 일제히 퇴학을 하든지, 자결하자고 울부짖었다. 나라 없는 군대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통탄한 끝에 지청천이 『기왕 군사 교육을 배우려고 왔으니 끝까지 배워 임관한 다음 중위가 되는 날 모두 탈출하여 광복 운동에 나서자』고 제의하여 이들은 손을 모아 실천할 것을 맹세했다는 것이다.
광복운동의 맹약은 결국 지육천만이 지키게되었으나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도 민족의 넋은 항시 간직되었던 듯하다.
추정 이갑 선생의 사위인 이응준은 지육천의 가족을 돕는 것으로 광복운동에 대신했고 홍사익은 일본 육군대학을 거쳐 한국사람으로는 중장이란 최고 계급까지 올라갔지만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으레 가난 때문에 광복운동의 맹약을 지키지 못했다고 후회했었다.
지청천의 본명은 지대형이었으나 사관학교에서는 석규라 했고, 만주벌판에서 활약할 때 이육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청천이 일군을 탈출한 것은 1919년 3·1운동 직후였다. 지 장군은 처음 국내로 탈출했다가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도망쳐갔는데 이때 그가 지참했던 최신 병서와 군용지도는 광복군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지 장군은 무관학교에서 교관을 하다가 1920년 소위 일군의 간도토벌작전에 분개하여 부하 1백50명을 거느리고 백두산 바로 북쪽 간도성 안도 현의 밀림 속에서 광복운동을 시작했다. 대한독립군단을 이끌던 김좌진 장군이 29년12월, 저격 받아 전사한 후 한국 독립당 군사 위원장을 했고 해방 때는 광복군사령관을 지냈다.
지 장군은 귀국 후 무임소장관, 민국당 최고위원관 2대의원을 역임했으며 1959년에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한말의 무관학교후예 중에 우리 건군에 참여한 이가 많은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응준(예비역중장)은 초대 육군 총참모장(현 참모총장)을, 신태영(예비역중장·신응균의 부친) 은 4대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유승렬(예비역소장·유재흥의 부친), 박승훈(예비역소장), 백홍석(예비역소장·채병덕의 장인), 김석원(예비역 소장), 김준원(예비역준장·김정렬의 부친), 안병범(예비역회장 6·25 때 자결·안광호의부친), 이대영(예비역준장), 장석륜·유관희·김종직(이상 예비역대령) 등이 군의 초창기를 빛냈다.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내가 잊을 수 없는 무인 중에 전인욱과 윤상필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일본 육사 27기생인데 공교롭게도 소련에 납치되는 운명을 같이했다.
김은 영친왕 부무관을 지냈으나 해방직전 평양에 있다가 전후 소련에 납치됐다.
그는 6척 장신에 위풍이 당당했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일본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는 결의를 지녀 영친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내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어느 날 인사하러갔더니 그는 당장『졸업성적이 시원치 않다』 고 대갈 질책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윤상필은 내가 35년 만주 돈화에 있던 독립수비 8대대로 전출됐을 때 안 선배였다.
그는 당시 신경의 척정사를 책임 맡고 있었는데 한번은 나에게『만주 국의 어떤 대신이 일본군 장교에게 일본 사람들이 만주에 많이 와서 개척해 달라는 말을 했다는데 이것은 마치 자기 아내를 강간한 사람에게 얼마나 재미 많았소, 언제라도 제공하오리다는 격』이라고 말하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킨 일이 있다. 그는 해방 후 귀국하지 못하고 소련에 끌려갔다 하니 애석한 일이다.
장군과는 관계가 없으나 구한말 관비생으로 일본 육사에 유학한 사람으로는 11기로 졸업한 여백린(임정군무부장·26년 상해에서 별세) 어담(일본군 중장)과 15기의 유동열(임정참모총장) 이갑(독립지사·17년 시베리아에서 병세) 박형철(전 조선은행 두취) 박두형(일군대좌)김영헌(군부인사 과장) 김응선·남기창·김기원과 23기의 김광서(독립지사)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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