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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문자는 필자>|<제5화> 「동양극장」시절 (10)|박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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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동양극장에 직영 극단이 셋이나 되어 작품인가 극본인 「레퍼터리」를 대기란 숨막히는 노릇이었다. 한달쯤을 본가 무대에서 새것으로 갈아대고 나서는 세 극단이 번갈아 동서남북으로 지방 공연을 떠났다. 그래서 서울 시골서 긁어 들이는 돈이 적지 않았다. 그렇건만 상업 은행의 빚 19만5천원을 갚으랴, 막대한 운영비를 조달하랴, 그 또한 숨이 턱에 찼다.
그렇게 하는 동안 지방에서 매일 은행을 통해 적지 않은 돈을 부쳐오는 것은 「청춘좌」뿐이고 다른 두 극단은 툭하면 「아고·오꾸레」(일어로서 「아고」란 단원들의 여관식대를 말하는 흥행사의 용어인데 「오꾸레」란 보내라는 일어-아고란 턱인데 먹으려면 턱을 움직여야 하니까 나온 말인 듯), 한쪽에서는 「노리·오꾸레」(역시 일어로 「탄다」는 말로 기차 삯 등) 수송비를 보내라고 전보만 치니 오히려 「청춘좌」가 번 돈을 찔러 넣어야 하는 판이어서 두 놈을 뭉뚱 구려 「호화선」을 조립하여 주로 지방으로만 항해시키니까 지방에서는 「청춘좌」를 보내달라는 청구서가 빗발치듯했다.
어느해 여름철이었다. 그 여름을 넘겨야 동양극장이 지탱하겠는데 「청춘좌」를 서울에 두어 두었지만 흥행사가 제일 무서워하는 「나쓰가래」(하한기)를 코앞에 두고보니 허둥대지 않을 수 없었다. 「나쓰가래」란 여름 한철 덥고 장마지고 냉방 장치가 없던 시대에 극장가에서는 파리만 날리고 땀만 닦고 있었다. 그래서 구수 회의를 열고 우선 내가 월탄에게 뛰어가서 의논한 끝에 그가 어느 잡지에 썼던 『황진이』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엮어 박종화 원작, 박진 각색·연출 『기생 황진이』라고 해서 7일간을 무대에 올렸더니 계속 초만원을 이루어 우선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서 뒤미처 이광수의 『단종애사』로 8일간 공연했더니 지방의 유림까지 동원되어 극장 바닥은 땀으로 호수를 이루었는데 이왕직의 반대로 상연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극장 형편은 한번만 더 이런 법석을 떨어야 할 터인데 극본이 없었다. 그러자 임선규라는 사람이 동양극장에 들어오기를 원하여 입장 시험으로 써 내놓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지독한 신파여서 그냥 내 궤짝 속에서 몇 달을 묵고 있었는데 아마 하도 반응이 없자 홍순언에게 직접 간청을 한 모양인지 하루는 홍군이 그것을 보자고 했다. 그래서 보였더니 이튿날 홍군이 그것을 하자고 우겨댄다.
나와 최상덕은 딱 잡아뗐으나 돈에 몰린 주인놈을 꺾을수가 없어서 최군이 장난으로 고친 제목대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간판이 어느틈에 나붙었다.
그 내용을 여기서 또 장황히 이야기 할 틈이 없으나 아무튼 신파 비극의 사십 팔수가 담뿍 들어찼고 기생을 좋게 써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별반 고등 신파에 흥미를 안 느꼈던 기생아씨들이 몰려오는데, 심지어는 돈냥간 쓸 작전으로 저녁때부터 명월관·식도원·송죽원 등 요리 집에 들어간 얼간들이 술상은 놓아둔 채로 기생의 꽁무니를 따라 동양극장으로 와 그 연극을 끝까지 보고 눈이 퉁퉁 부은 기생을 따라 다시 그 술상 앞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기생아씨네의 관극 평과 각자의 하소연을 듣고 새벽녘에 또 그 기생을 모시고 15전짜리 설렁탕 집에서 해장을 하는 것이었다.
이 신파 연극의 주인공은 홍도라는 기생으로 부유한 집 아들과 연애를 해서 시집살이를 하는데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기생인 까닭에 시집살이가 어려웠고, 기생인 까닭에 모함을 받았고, 너무나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에 살인을 했고, 얄궂게도 그를 포승으로 묶어 가는 것이 순사인 그의 오라버니였다. 여기서 차홍녀가 홍도역을 했다.
그때 기생사회에서는 홍도와 홍녀를 혼동하기도 해서 화제마다 홍도-홍녀 홍녀-홍도, 이래저래 차홍녀의 인기는 오르기만해서 동양극장의 월급도 올랐다. 아무튼 이것을 보러 기생·오입장이·노나니꾼·바람둥이·시골사람·촌사람 몰리고 몰려 극장 전면을 환하게 박아 놓은 유리가 모조리 깨지고 서대문 경찰서에서는 정리한다고 나와서는 구경온 사람을 두들겨 패고 새 문 마루턱이 막혀 전차가 못 다닐 지경을 하면서 아흐렛 동안 공연을 했다. 분장실은 홍도 좀 만나자고 찾아드는 기생들로 붐볐고 그 오라비역을 한 황철이는 도색아가씨들의 「인사차내방」으로 핑크색 비명을 올렸었다.
그러면서 그 연출을 맡은 나를 찾는 할미하나 없었으나 나는 이름을 바꾸고 싶도록 낯이 화끈거렸다. 그것은 홍군은 신이 나서 영화로 한다고 법석을 했지만 이모씨의 감독과 기술이 자신은 있었건만 현상을 해보니 흑과 백으로 구분이 됐어야 할 그림이 시종 흑만 나와서 결국 그 당시는 거금인 4천원을 손해보고 단념을 했다.
그때 이 연극에 이서구가 쓴 가사를 붙여 <길가에 핀 꽃이라 꺾지를 마오…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 유행가는 요리집은 고사하고 목노집 색주가집 심지어 거리거리에서 판을 쳤다. 그러고 진짜 신파 극단에서는 이 연극의 표절 아닌 도용으로 재미를 보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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