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의 활동>
지금은 박사 학위를 받은 의사가 수백 명이나 되지만 내가 학위를 받은 l930년 안팎에는 박사학위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이 힘드는 일이고 또 드물었다.
요즘은 명예박사도 흔하지만 그때는 명예란 것이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가장 먼저 학위를 받은 사람은 1918년에 경의전을 나온 윤치형씨로 알고 있다. 그는 아마 1922년에 학위를 받았을 것이다. 그 다음이 1913년에 경의전을 나온 심호섭씨 이다. 26년에 경성제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세브란스의 신필호씨는 1914년에 나왔으나 학위를 따는 것은 조금 늦어서 35년에 일본 구주대학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브란스를 나와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는 전 의사회장인 이용설씨가 35년에 경성제대에서, 오경선씨의 자제이며 전 보건부 장관을 지낸 오한영씨가 32년에 경도제대에서, 전 서울대학 총장을 지낸 윤일선씨는 29년에 일본 경도제대에서, 전 세브란스부총장이던 김오선씨는 32년에 미국노드웨스턴 대학에서, 박용래 소아과 병원의 박용래씨는 일본 지바(천섭) 의대에서 36년에 학위를 받아 이름이 알려졌다.
경의전을 나온 사람으로는 윤치형씨와 동기인 유일준씨가 세균학의 권위자로 이름이 났는데 30년께 학위를 받았고 의사신보 사장인 김형익씨가 35년께 경성제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여자로서는 손치정씨가 가장 먼저인데 35년께 학위를 받았다
처음부터 세브란스와 경의전은 라이벌이 되어 지금도 경쟁의식에 가득 차 있지만 30년대에도 마찬가지로 심한 학문경쟁의 불꽃을 튕겨 학위 받는 것도 경쟁이 되다시피 하여 두 학교 출신자의 학위 획득 비율이 40년대까지는 비슷했다.
이 두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오늘날의 우리의 학계 중심인물이 되고 있는데 세브란스를 나온 사람 중 이영춘씨는 1929년 졸업생으로 지금 개정 농촌병원을 열어 슈바이처를 연상케 하는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차츰 의료인들이 늘어나고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늘어나 의료수준이 높아지자 자연 의료인들의 활동이 있게 마련이었다.
의학회의 활동이 활발해진 것이었다.
원래 우리 나라의 의학회는 l908년11월에 한국의사연구회가 생겨 초대 회장에 김익남씨, 부회장은 안상호씨가 취임해 있었다.
이 의사연구회는 이보다 앞서 1월에 일본인 의사만으로 발족했던 한국의학회와 대립하여 달마다 제1일요일에 모여 발표회를 갖는 등 자질을 높이려고 애를 썼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연구회는 2년 뒤 한일합병 후부터는 활동이 자유롭지 못해서 위축되어 있다가 1911년에 총독부 병원에서 조선의학회로 개편됐지만 활동은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하자면 암흑기 동안이 l930년까지 계속돼 오다가 신진 의학도들이 주동이 되어서 1930년2월에 세브란스에서 조선의사협회가 새로이 발족했던 것이었다.
이 협회를 만드는데는 약관이던 윤일선씨와 이갑수씨의 두 사람이 주선했는데 이해 9월에 가진 창립총회에서는 간사장에 박계양씨, 서무간사에 유상규·구영숙(전 보사부 장관)·조한성·고영목(고영순씨 동생)·이선근씨, 경리간사에 김동익씨(동국대 총장)·안종서·백린제·심호섭·신필호·신용균 그리고 사회간사에 윤일선·박계양·이용설·이갑수·유일용씨 등이 선출되었는데 말하자면 이 멤버는 그 당시의 의학계를 대표하는 신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사회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9년만에 다시 해산해 버렸다.
그런데 서울에는 이 이사회와는 따로 또 하나의 의사회가 있었다. 한성이사회이다
이것은 1912년에 서울에 있는 일본인 의사들이 경성의사회를 만든 것에 맞서서 서울에 있는 한국인 의사들만으로 의사회를 조직한 것이었다. 회원은 30여명이었고 초대 회장은 안상호씨였는데 몇 차례 회장이 바뀐 끝에 나는 l936년과 37년에 회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회장을 맡은 1937년은 바로 일본인 의사단체인 경성의사회가 25주년을 맞는 해여서 기념식을 크게 열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 자극을 받아서 25주년이 채 되지 않았으나 일본인 의사회를 앞질러 약5백원의 경비를 들여 명월관에서 먼저 성대한 기념식을 해 버리고 말았었다.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었고 단지 지기 싫은 오기뿐이었다
표면상으로는 경성의사회와 한성이사회는 잘 지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러한 데까지 민족의식이 스며 있었던 것이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었는데 이 때문에 나라가 있었다면 정치로 나갈 사람들이 많이 의사가 된 것이었다.
해방 후 정계에 나선 사람 중에 의사가 많았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인데 내가 알기로는 이영준(제헌국회의원) 최규옥(전 농림장관) 전혜식(납북) 구덕환(납북) 이용설 조경규(전 국회의원) 조영규(전 국회의원) 신현돈(전 내무장관) 김성진(국회의원) 최재유(전 문교 장관) 민병기(전 충남지사) 구영숙(전 보사부장관) 손창환(전 적십자 총재) 육완국(전 국회의원)씨 등은 처음부터 정치로 나갈 사람이 길을 잃어 의사가 되었던 것으로 믿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계속> [제자는 필자]계속>의사들의>
(37)제3화 인술 개화(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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