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개인 병원>
내가 안동 병원에서 도립 초산 병원으로 전근하여 1년쯤 됐을 때의 일이었다. 1927년 봄으로 기억한다.
읍에서 2백 리쯤 떨어진 관 면이란 마을의 김 모라는 사람이 진단서를 떼 달라고 나를 찾아왔다.
경위를 들으니 판 면 경찰관 주재소의 일본인 순사부장에게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매를 맞았는데 고소장을 내려니 진단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상처를 보니 발에 채고 맞은 타박상이었다. 그러나 판 면에서 읍까지 2백 리 길을 걸어서 오는데 4일이 지나고 보니 상처가 거의 희미해 보였다.
그래도 나는 진단서를 써 주었다.
그 뒤 이것이 말썽이 되었다. 김 모가 이 진단서로 고소를 하자 순사부장은 고등계로 달려가서 부정 선인(일본 순사들은 독립 지사, 애국자들을 이렇게 불렀다)을 교도하느라고 때렸는데 공무원인 정구충이 진단서를 썼으니 말이 되느냐 그 총독부의 고등계에 고자질한 것이었다.
결국 병원장인 일본 사람이 나에게 사표를 내라고 했으나 나는 한동안 내지 않고 있었다.
그 러는 동안 어느 날 우연히 신문을 보았더니 박창훈이 외과의로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박창훈은 1919년에 경의 전을 나왔는데 나와는 경기 중학교의 동기생이었다.
친구에게 졌다는 생각도 들고 사표도 내라는 판이니 이 기회에 공부나 더하자는 생각으로 초산 병원을 사직하고 다시「오오사까」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폐결핵을 2년 동안 연구했다.
내가 1930년에「오오사까」의대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와 처음으로 정구충 외과의 간판만을 건 곳은 지금의 서울 종로3가「피카디리」극장 옆 고 영「빌딩」자리였다.
이때쯤 서울에는 일본인 의사가 30명, 한국인 의사가 20명쯤 개업하고 있었다.
서울에 개인 병원이 생긴 것은 1886년에 일본인 의사「후루기」가 세운 찬 화 병원이 처음이었다. 지금의 YWCA건물의 근처인 구리 개에 있었는데 이 사람은 1880년에 그 해 일본 공사이던「하나부사」를 따라와 공사관의 촉탁 의사로 있다가 86년에 개인 병원을 차렸던 것이다.
뒤의 일이지만 해방 후에 지금 세종로 비각에 있는 만세 문이 이 집터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이보다는 늦지만 지금의 서울 저 동의 백 병원 자리에서 일본사람「우에무라」가 병원을 차렸다.
이 집은 본래 한-일 합방 때의 공으로 이완용 등과 같이 귀족이 된 자작 조중훈의 살던 집 자리였다.
나중에「우에무라」씨는 제자이던 백인제에게 이 병원을 물려주었는데 대개 1935년쯤의 일이다.
내가 개업했을 때는 관수동에서 조 한성 씨가 개업해 있었고 외과의 박창훈 씨가 낙원 동에서 경의 전을 나온 심상천 씨가 같이 낙원 동에서 이비인후과를 개업하고 있었다. 심씨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40년째 개업을 하고 있다. 나와「오오사까」의대의 동창인 고영순씨는 화신 뒤 공평 동1에 내과 병원을 하고 있었다. 임명재 씨와 오천석씨는 합동으로 지금「걸·스카우트」본부가 있는 자리에서 병원을 내고 있었다.
내과·외과 등 전문 과목을 간판에 달기 시작한 것을 1925년 위의 일이었다. 제일 먼저 내과 간판을 건 이는 김용채씨인데 1920년쯤의 일이다. 이 앞에 개업했던 안상호씨, 박계양 씨 등은 전혀 전문 과목을 달지 않고 있었다.
김용채씨는 환자의 냄새만 맡아도 병을 알아낸다고 소문난 명의였다. 특히 장티푸스의 권위로 그 때는『염병에 걸리면 죽는다』던 때여서 이름이 떨쳐 고관대작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분이었다.
외과에서는 관수동의 조한성씨가 전문의 간판을 먼저 내걸었지만 1929년쯤의 일이었다.
일본 의사 중에는 백 병원 근처에 있던「고오도」산부인과 병원이 알려져서 있었다.「세브란스」를 나온 신필호 씨가 인사동에서 부인과 병원을 열어「고오도」와 경쟁하는 입장에서도 명의라는 인기를 끌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 때는 나라가 망하여 모든 사람이 실망하고 있을 때로 주색잡기가 심했고 따라서 화류 병이 많았다. 이 고관이나 부자 양반들이 밖에서 얻은 화류 병을 집안까지 옮겨 마나님들이 얼굴을 가리고 몰래 치료받으러 가느라고 고통을 받은 이가 꽤 많았던 것이다.
나는 개업하면서 곧「X 레이」를 사들였는데 개인 병원으로는 처음이던 것 같았다.
「세브란스」에는 1925년에 들여와 있었지만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 당시 총독부는 개인 병원의 개업을 권장하고 있었다.
연중 장티부스 등 전염병이 그치지 않았으나 공립·국립 병원 등만으로는 손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1932년으로 기억되는데 이용설 씨가 한번 크게 이름을 떨친 일이 있다.
이용설 씨는「세브란스」를 3·1운동이 있던 1919년에 졸업, 1935년엔 경성 제대에서 학위를 받고「세브란스」에서 소아과 병실의 교수였던 때이다.
그는 그해「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 지역 의학 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여 유창한 영어로 참석 인사를 했다.
일본 대표가 깜짝 놀라 어떻게 조선 대표가 참석했느냐 로 왈가왈부하여 한동안 크게 문제가 되었으나 그가 의사라 그 위 사건은 흐지부지 되었으며 이용설 씨의 이름은 널리 알려 졌다. <계속>계속>초기>
(36)<제자는 필자><제3화>인술개화(8)|정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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