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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제자는 필자>|<제3화>인술개화(6)|정구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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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의약품의 부족>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질이 꽤 많았던 모양이었다. 1905년, 보통학교를 나와 신문을 볼 때쯤 됐을 때 신문에는 금계 랍 광고가 제일 많았던 것이 기억난다.
의사가 되고 나서 조사해 보았더니 우리 신문에 약 광고가 처음으로 난 것은 1890년, 내가 두 살 때의 일로 독립신문에『학질에 백발백중하는 금계 랍을 판다』는 광고가 나 있었다.
나는 2년 동안 안동 도립병원에 있다가 평안북도의 초산 병원으로 옮겨갔는데 여기서 경험한 것은 의약품의 부족이었다.
환자 가운데는 성병도 상당히 많았으나 지금과 같은 페니실린 등 항생제가 없어 모든 병을 쉽게 치료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경성에는 매독에 잘 듣는다는 소문난 606호가 이미 오래 전부터 수입돼 있었다.
내가 오오사까로 유학 가던 1912년 매일신보에는 박용남씨가 606호를 놔준다는 광고를 내고있었다.
박용남씨는 1909년에 이미 신예신보를 발간하고 있었다. 그는 동-서 의를 겸한 선구자로 오히려 서의에 가 까왔으며 동서의약 방이란 가정구급용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박용남씨는 606호를 파는 것보다 주사를 놓아주는 사람으로 이름난 것이 특이했다.
역시 그 무렵엔 의료기관이 보급되지 않아 갖가지 매 약이 성행했지만 약도 금계 랍이나 606호와 같이 치료약은 모두 수입품이었고 우리 나라에서 만든 것은 팔보단이니, 자선 환이니, 청심환인지 하는 구급약 또는 보건약품뿐이었다.
이름에 일본인 약 행상이 몰려 경향 각지에 돌아다녔다. 특히 약 행상으로 돈번 일본 사람이 많았다.
대게 1905년에서 10년께로 짐작되지만 아라이라는 일본인 행상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특히 호남지방을 돌아 다녔다. 이자는 인 단을 갖고 왔는데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선전하면서 6, 7월에 농촌을 돌며 가을에 쌀로 받기로 하고 의상을 놓고 다녔던 것이다.
이자는 술책에 속아 외상이라면 소도 자아 먹는다는 배짱으로 마구 농사꾼들이 인 단을 팔아주었던 것이다.
1911년께 인데 우리 나라 처음의 법인체 제약회사로 조선 매 약 주식회사가 생겼고 여기에 만병통치란 영신 환 이 크게 선전되었다.
이보다 앞서 동화약방에서 활명수를 만들고 있었는데 이는 민병호란 사람의 개인 집이었다.
여기에 비해 조선 매 약은 이석모 란 사람이 그때 이름 있던 평화 당 약방의 최응선, 제 생 당의 이경봉과 같이 자본금 50만원을 내어 꾸민 회사였다. 사장인 이석모는 일본 등을 다녀온 선구자였다.
이 회사가 곧이어 내 놓은 약이 팔보단·자양 환·태양조경 환·회생 수·소생 단·하리 산·급체 쾌 통산 등인데 대개 알약과 가루약이었다.
지금도 어렸을 적 기억이 나지만 바로 이 조선 매 약이 생기기 직전 경인철도의 객차 안에서 유창한 목소리로 청 심보 명단을 선전하는 이가 있었다.
지금의 은 단과 비슷한 모양이었는데 이 분이 제 생 당 약국을 세웠다가 뒤에는 조선 매 약에 참가한 이경봉이란 것을 뒤에 알았다.
이 이경봉의 제 생 당 약국은 인천에 있던 세원 양 행과 계약하여 외국의 약품을 많이 수입 판매했다. 아마도 약품 무역의 효시가 아니었던가 한다.
1905년에서 1915년까지의 연대에는 지금의 서울 을지로 2가인 구리 개에 약방이 밀집해 있었는데 제 생·평화 당이 외에 자혜 대 약방·대일 약방·홍 제 당·천은 당 등이었다.
모두가 제약과 판매를 겸했는데 여기서 가장 오래된 제약 업체는 회화약방의 활명수였다.
활명수는 1897년에 나오기 시작하여 1916년에 있던 조선대박람회 때부터 전국에 선전이 되었다. 1910년께 부터 조선 총독부의 특허권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이 활명수 본 포인 동화 약품의 2대 사장이던 민강씨는 1920년께 독립운동을 하다 상해로 피신했으나 잡혀 옥사한 애국자이기도 하다.
그러자 정착 양 약방이 생긴 것은 1922년으로 삼우 당 약방이다. 이때쯤에는 유명한 일본의 약이 들어와 판을 치고 있었으며 눈약으로는 대학안약, 관절염에는 류마치 아레치자스 등 매독에는 먹는 약 요도 가리 환이 있었다.
치료약은 대부분 일본제약업자가 우리 나라에 대리점을 두고 공급했다. 외과용 약품은 지금의 약과는 비교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때는 수술을 했을 때 지금처럼 곪지 않게 항생제를 쓰고 즉시 꿰매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수술한 자리에 머큐럼(아까징끼)에 흠뻑 적신 솜을 틀어막아 생살이 돋아나 아물 때까지 날마다 이것을 갈아주었는데 그때마다 환자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1920년에는 우리 나라에 호열자(콜레라)가 돌아 전국에서 약 2만 명이 사망했다. 이때는 한의를 찾는 환자가 많아 방역을 크게 망쳤던 일이 있다.
갖가지 소독약품도 시원치 않았다. 호열자 환자를 맞는 한의는 정말 난처한 입장에 서 있었으나 그래도 한약을 꼬박꼬박 지어 주었다.
이것을 안 일본 경찰은 강권을 발동하여 호열자 환자를 고발 않고 약을 지어준 한의들을 모조리 검거하여 벌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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