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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너의 목소리가 들리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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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요즘 TV 드라마에 초능력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듣거나(‘너의 목소리가 들려’) 귀신을 보기도(‘주군의 태양’) 합니다. 저는 ‘굿 닥터’에 나오는 ‘박시온’(주원)의 능력이 부럽습니다. 자폐증 병력을 지닌 소아외과 레지던트인 그는 어린 환자들에게 눈을 맞추고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입니다. “어릴 때 상처를 받으면 머릿속에 운동장만 한 멍이 생겨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능력 덕이겠지요.

 얼마 전 대학 교수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40대인 J교수는 대학원생 논문 작성을 지도하면서 ‘읽는 능력’의 문제를 절감하고 있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기존 연구결과들을 요약하는 것까지는 잘해요. 그런데 A논문엔 어떤 한계가 있다, B논문은 무슨 문제가 있다, A논문과 B논문은 어떻게 연관된다, 그런 것들은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지도교수의 당부를 떠올리더군요. “사회과학을 하려면 신문을 읽어야 한다. 단, 종이신문을 봐라. 인터넷으로 보면 눈에 띄는 부분만 골라보게 된다.” 글 전체를 한 덩어리로 읽지 않으면 정확한 이해도, 비판도 힘들다는 지적입니다. 다른 대학의 Y교수는 보다 심각한 우려를 털어놓습니다. 강의 때마다 마주치는 당혹감입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아요. 말로만 설명하면 안 되고, 칠판에 내용을 써야 해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죠. 문자 메시지와 카카오톡, 예능프로 자막이나 말풍선에 길들여져서 그런 건지….”

 정보와 소식이 넘쳐나는데 왜 읽는 능력은 떨어지고 듣는 능력은 약해지는 걸까요? 하긴 스마트폰, 이어폰 사용이 늘면서 소음성 난청을 앓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하지요. 『관찰의 힘』은 음울한 미래를 예고합니다. “통신기기를 귀에 이식해 24시간 1년 365일 접속 상태를 유지하는” 시대가 온다고.

 귀와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은 공부, 나아가 사회생활의 기본입니다. 생각과 느낌이 뇌와 심장에 머무르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귀에서 입으로, 눈에서 손으로 직진하는 한 다른 사람, 다른 생각을 배려할 공간은 존재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저는 비단 미래세대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앙일보 ‘대한민국 중학생 리포트’의 지적처럼 “아이는 어른의 거울”입니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댓글, 트위터에서 전체 맥락은 무시한 채 일부 대목만 떼어내서 공격하는 경우들을 보곤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자신의 선입견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지요. 무엇이 진실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안타까운 건 국정을 책임져야 할 정치인도, 진실을 전해야 할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국정원 댓글, NLL 논란, 검찰총장 ‘혼외아들’ 의혹…. 대화와 토론은 사라지고 드잡이 같은 구호와 선정적인 깃발만 나부낍니다. 그 까닭이 듣는 능력의 부재에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정부와 야당이, 보수와 진보가 ‘내 편’ ‘네 편’으로 가르는 구시대적 이분법에 빠져 있는 것도 ‘너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 아닐는지요.

 총명(聰明). 귀 밝을 총, 눈 밝을 명입니다. 왜 귀가 먼저일까요? 눈은 늘 한쪽만 향하지만 귀는 모든 곳에 열려 있기 때문 아닐까요? TED 강연에서 음향 전문가 줄리언 트레저는 “귀 기울여 듣기 위해선 매일 3분씩 침묵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귀를 초기화(reset)하라는 충고입니다.

 아무래도 지금 우린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깊어가는 가을날, “내 말부터 들으라”는 윽박지름 속에 여러분과 제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고민해 봤으면 합니다. 어떤 물음에도 마음 문을 열어 둔 채로.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