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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적치하의 3개월(19)|잔류의원(2)|「6·25」20주 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북괴가 잔류국회의원을 그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백%이용하려고, 위협과 회유의 수법을 번갈아 구사했다는 것은 전회의 박순천씨 발언에서 소상히 밝혀졌다.
국회의원 감금 장소인 서린 동이 성남호텔 생활은 초기에는 다른 유치장에 비하면 표면상으로는 비교적 자유로 왔다는 것도 관계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소위 남북협상 때, 김구선생과 함께 평양까지 갔다가 선망, 다시 대한민국에 되돌아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성북구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된 한독 당 계의 조소앙씨를 북괴가 크게 정치적으로 다시 이용하려고 했다는 시사가 있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 증인은 조소앙씨가 처음 며칠은 성남호텔에 나타났지만, 그 후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 소문으로는 그들이 조소앙씨를 빨리 세뇌시켜 잔류국회의원들로 하여금 미국의 한국전 개입 규탄을 결의시키도록 공작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북괴의 잔류국회의원에 대한 공작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몇몇 의원들이 방송과 집회연설을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강요에 못 이겨서이었다.
59명의 잔류의원들 대부분은 지조를 지켜 적 치하에서 견디어내다가 막판에 가서 31명은 도피은신으로 9·28수복을 맞이했고, 28명은 납북의 비운을 되씹게 되었다.
서울의 경우와는 달리 지방에서 적 수중에 들어간 국회의원의 운명은 더 비참했다.

<최윤호 김홍용 의원 처형>
전북의 최윤호 의원과 전남의 김홍용 의원의 경우와 같이 공산 유격대에 의해 즉결처분을 받기도 하고 엄상섭 의원처럼 낙도에서 고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럼 다시 몇 잔류생존의원으로부터 적 치하 3개월의 회고담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김의준씨(당시 국회의원·현 변호사·62)『북괴는 남하를 못한 의원들을 성남호텔에 끌어다 모아 놓고 집단 감금생활을 시켰는데 처음에는 비교적 자유로 왔어요. 잠은 자택에서 자게 하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시켰고, 쌀밥에다 고기반찬까지 주었습니다.
그들은 남하를 못한 59명의 의원들이 모두 모일 때를 기다려 납북하려는 의도로 환심을 사는 공작을 한 것이죠. 그러나 전원이 다 안 모이니까, 마침내는 북으로 가자는 설득을 시작하더군요. 그때 성남 호텔에는 북괴 인민의회 대의원 한 명이 내려와 우리와 같이 기거하면서 이런 설득공작을 합디다. 처음에는 밥도 얻어먹고, 전황도 알 겸 꽤 많이 모였어요. 안 나가면 데리러 오고요. 그때 여운홍씨는 자기 집에다 경무대 경호 실에 근무하던 사위를 지하실에 숨겨 놓고 무전과 라디오를 들어서 누구보다도 정확한 전황을 알고 있었지요. 그분한테 전황을 듣고 유엔군이 반드시 서울을 탈환하리라는 확신을 가졌어요.

<조소앙 씨는 곧 자취 감춰>
조소앙씨는 한 두 번 성남호텔에 나왔다가 안 보였는데 소문으로는 그들이 바로 북으로 데려 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겉으로는 융숭한 대접을 하는 체하면서도 밤에는 정치보위부원이 집으로 찾아다니며 가택 수색을 하고 잡아가곤 했어요. 위협과 회유의 양면 작전이지요. 이래서 나는 밤에는 이곳저곳 아는 사람 집을 찾아다니며 자고 낮에는 성남호텔에 나가곤 했습니다.
하루는 낮에 입정 동 집에 들렀는데 마침 보위부원이 찾아와서 나갔더니 권총을 들이대며 끌고 가요. 궁정 동 내무서로 데리고 가서 조사를 하더니 옥인 동에 있는 정치보위부의 지하실에 처넣더군요. 새벽 2시쯤 끌어내다 취조를 하면서 자술서를 쓰라는 거예요. 별로 쓸게 없다니까 무릎을 꿇어앉히고 총개머리로 마구 내리 칩디다. 그리면서 판사 할 때 좌익 탄압하던 이야기를 쓰라는 겁니다.
팔을 묶인 채 잠을 자고, 용변도 보고 식사 때에는 개처럼 혀를 그릇에다 대고 먹었습니다.
이런 감옥생활을 약 2주일 정도 했지요. 내 감방에 1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모두 중범인 같았으며 서로 말도 한마디 못하게 해요. 2주일만에 트럭에다 싣고 현 국립도서관 자리에 있는 정치보위본부에 갖다 넣더군요.
여기에는 여러 저명인사들이 수감돼 있는데 아는 사람들도 많아요. 기가 막힌 것은 검찰서기를 하던 내 동생도 들어와 있어요. 여기서 처음으로 포승은 풀어주었지만 조그만 유치장에 여러 명을 처넣어 꼼짝할 수가 있어야지요. 또 자술서를 쓰라고 해서 대강 썼습니다. 군납용 양곡회사를 차렸다가 잡혀온 자가 바로 내 옆에 있었는데 나를 보고, 국회의원은 잘 대접해 준다면서 자기가 말해주겠다는 거예요.

<호텔 들러 서로 전황 교환>
나는 말렸는데도 그 자는 취조 받을 때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합디다. 그 말을 들은 지 한시간만에 풀려 나왔어요. 지금도 군납사회의 그 자 정체가 알쏭달쏭해요. 석방된 후 다시 성남 호텔로 찾아갔더니 여전히 국회의원들이 나오더군요. 전세를 물으니 유엔군이 곧 어이에 상륙할 기세라는 거예요. 나는 최국현 의원(고인)하고 세출계획을 짰지요.
하루는 북괴 대의원이 집합을 시키더니 안 나오는 국회의원들을 책임지고 다 찾아오라는 거예요. 이때는 처음에는 많이 나오던 의원들도 나오는 등 마는 둥 했습니다. 두 사람씩 한 조를 짜서 동료의원을 찾아오라고 내보내더군요.
나는 양재하 의원하고 한 조를 매기더니 이상철 의원을 책임지고 꼭 데려오라고 하더군요. 이 의원 댁에 갔으나 집에 없어서 그냥 돌아오다가 양 의원을 보고「이북에 가보았자 기껏해야 석탄 부 밖에 안될 테니 같이 도망치자」고 했으나, 왠지 말을 안 들어요.「나하고 같이 나왔다가 당신만 없어지면 내가 큰일나니, 오늘은 함께 들어갔다가 내일 당신 혼자 도망치든지 하라」고 애원하다시피 해요.
나는 양 의원이 내 중학 선배고 해서 믿고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공명을 얻지 못해, 여간 불안하지 않았어요. 그래 할 수 없이 둘이 함께 호텔에 들어갔더니, 다른 조들도 대개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더군요. 그러자 북괴 대의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오늘은 그만 집에 가고 내일 일찍 나오라고 하데요. 나는 그 길로 종로4가에서 양복점을 하는 고향 친구 최응삼씨 집으로 가 2층에 숨었습니다.

<피신 이틀 후 의원들 납북>
이렇게 며칠 숨어있는데 하루는 총소리가 나며 시가전이 벌어지면서 최씨 집에 불이 불었어요. 여기를 빠져 나와 이번에는 최씨 형인 최응조씨 집으로 가서 숨었다가 수복을 맞이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성남호텔에서 도망친 2일 후에 그곳에 모인 국회의원들을 몽땅 트럭에 실어 북으로 끌고 갔다는 군 요.』
또 한 사람의 잔류생존국회의원의 이야기.
▲여운홍씨(당시 국회의원·80)『27일 새벽에 다시 내 집이 있던 회현동 관할 파출소 순경이 데리러 와서 중앙청 내이 의사당에 갔더니, 수도사수를 결의한다는 거예요. 모두 이의가 있을 수 없지요. 겨우 과반수가 나왔지만 만장일치로 결의안이 채택됐지요. 내가 피난을 못간 것은 이 결의안과 이승만 박사의 녹음 방송 때문이에요.
28일 아침에 괴뢰군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그날 오후가 되니까 벌써 그 자들이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참 빠르더군.
성남호텔로 가자고 해서 따라가 보니까 벌써 40여명이 붙들려 왔어요. 김용무·이종성·백관수·장건상·윤기섭·안재홍·조소앙·김의준 의원 등이 눈에 띄더군요. 개회한지 닷새만에 이런 변을 당했으니까 서로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모두가 풀이 죽어 불안해합디다.
나는 집이 가까워서 아침 9시경에 나갔다가 저녁5, 6시쯤 돌아오곤 했죠.
처음에는 그런 대로 대우가 괜찮았어요.

<밥 먹으러 호텔 들르기도>
별로 귀찮게 굴지도 않고요. 특히 식사를 주니까, 그것을 바라고 나온 사람들도 많았어요. 길바닥의 쇠똥만 보아도 자꾸만 빈대떡으로 착각할 만큼 배가 고팠으니까.
나는 적 치하에서 두 번이나 서울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지금 이름은 대지 않겠으나 믿고 아는 사람이 고자질을 해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중 라디오를 통해 유엔군의 인천 상 륙 소식을 알았어요. 큰 소리는 아니지만 난, 미국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들 미력을 알거든요. 템포는 느리지만 미국의 방대한「물량작전」이 발동하는 날에는 북괴 패배는 필시라고 단정했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몸을 피해 성남 호텔 출입은 일체 않고 정신안중에 다니는 딸애를 시켜 호텔에 드나들던 백상규·박순천씨 등 몇몇 동료의원들에게 사발통문 식으로 이 소식을 전해주었지요. 이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한 의원들은 대개 납북을 면했어요.』
59명의 잔류의원 중 납북을 모면한 31명의 의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주=28명의 납북의원 명단은 본 연재 제7회에 기 보)
김병진 김상현 김시현 김의훈 김정기 김정실 김준희 박민기 박양재 박성하 박순천 변광호 변진갑 서상호 신광균 신중목 양우정 엄상섭 여운홍 이교선 이교승 이긍종 이채오 장건상 정순조 조 순 조시원 최국현 한필수 홍길선 홍창섭(가·나·다 순)
※알림=6·25당시의 황호근 대위(육사4기)를 아시는 분이나 당시 서빙고에 주둔했던 제3연대장교로 동두천 전투에 참전한 분이 계시면 연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연락처=중앙일보 편집국「민족의 증언」담당자 앞 전화(28)82011(교환)의 74번 야간은 (93)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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