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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민심 갖고 쇼하지 맙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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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윤호
논설위원

명절이면 정치인들이 꼭 입에 올리는 게 있다. 추석민심이 어떻고, 설민심이 어떻더라 하는 말이다. 지난 추석에도 그랬다. 연휴 직후 민주당은 ‘추석민심 보고 간담회’를 했다. 공식행사를 하진 않았지만 새누리당도 의원들의 입으로 추석민심이란 걸 부지런히 전했다. 민족의 명절에 확인된 민심이라니 보통 때의 민심과는 무게가 좀 달라 보이긴 한다. 그래서 평소 민심에 아랑곳 않던 정치인들이 대목 때 몰아서 신경을 쓰는지도 모른다.

 소박한 질문 하나 해 보자. 외국에도 우리의 명절 민심이란 게 있나. 외국 물깨나 먹은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딱 부러진 답을 얻진 못했다. 서양의 추수감사절 민심, 크리스마스 민심을 다룬 외신 본 적 있나. 일본서도 정월이나 오봉(お盆) 민심 따로 있다는 말 못 들었다.

 그럼 유독 우리만 명절 때 집집마다 모여 앉아 시사토론이라도 하며 민심을 가다듬는다는 말인가. 덕담 나누는 명절 밥상에 비호감 정치를 올리는 집안이 그리도 많나. 명절 민심이 실재한다면 벌써 학자들의 논문이 쏟아졌을 것이다. 국회전자도서관 학술정보에 접속해 ‘추석민심’ ‘설민심’을 검색해 보라. 시사지 르포 몇 건 나오고 만다. ‘민심’으로 검색하면 1200여 건이 뜨지만, 정치권이 말하는 민심에 대한 논문을 찾긴 어렵다. 검색어 ‘민심’에 충실한 컴퓨터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관련 논문을 수두룩하게 쏟아낼 뿐이다.

 도대체 명절 민심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정치권의 이미지는 이렇다. 모처럼 온 가족이 둘러앉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이게 감응과 감응의 연쇄반응을 통해 방방곡곡 퍼지며, 결국 민심의 소용돌이를 부른다….

 우리 정치인들이 정말 그런 걸 기대한다면 큰 착각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명절을 전후해 조사 결과가 뚜렷이 달라지는 현상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의 추석 전후 실시했던 중앙일보의 여론조사 결과도 ‘변화 거의 없음’이었다. 야권에선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이 곧 추석민심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지지율을 떨어트릴 만한 재료가 잇따랐던 탓이지 민심으로 확대 해석할 일이 아니다.

 물론 오래전 명절의 여론 동향이 중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귀성객들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시사정보를 확산시키거나, 농촌의 여론을 도시로 피드백했다. 정보와 소문이 한데 얽혀 민초들의 정치의식을 충분히 고양시킬 수 있는 환경이었다. 반면 지금은 어떤가. 농촌에서도 알 건 다 안다. 서울에서 내려간 자식들에겐 어르신을 위해 새로 풀어놓을 만한 이야기 보따리가 없다.

 추석과 설은 즐거운 명절이지 정치적 민심의 발원지가 아니다. 굳이 명절 때 민심을 떠벌리는 것 자체가 정치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특히 정치인의 명절 민심탐방은 믿을 게 못 된다. 일종의 여론조사인 셈인데, 그 방법이 졸렬하고 비과학적이다. 종친회·동문회·후원회·사회복지시설 등을 두루 돌며 귀동냥하는 게 대부분 아닌가. 여론조사에서 따지는 표본 대표성이고 뭐고 없다. 듣는 것이라곤 동질적 집단 내의 폐쇄회로형·자기증폭형 의견뿐이다. 다른 여론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러니 같은 지역에서도 여야 의원이 전하는 민심이 영 딴판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만 민심으로 포장해 전파하는 데 불과하다. 한마디로 구전(口傳)문학이다.

 국민의 의식이나 여론은 늘 변하는 법이다. 그 중간중간에 명절이 끼어 있을 따름이다. 연휴 중 지역구에서 들은 얘기를 새로 확인한 추석민심인 양 떠벌린다면 평소 지역구민과 전혀 소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여야는 연일 추석민심을 받들겠다 한다. 천심 같은 민심이 정말 있다면 다들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 서로 자기네 민심이 옳다고 우긴다. 다음 설에도 재방송을 틀 기세다. 이젠 자신도 모르는 민심 갖고 더 이상 쇼하진 말자. 민심의 주체인 민초들이 되레 민망해진다.

남윤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