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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새신랑의 환각 속에 예기치 못한 향연|김찬삼 여행기<퉁가 군도에서 제6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며칠동안 자전거를 타고 온종일 쏘다닌 데다가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줄곧 맞바람을 받으며 80여리나 달렸더니 아마도 원숭이의 빨간 궁둥이처럼 볼기짝의 가죽이 벗겨진 듯 몹시 아렸다. 앞으로도 더 자전거를 타야하니 약을 사서 발라도 소용없을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저만 치서 달려오던 자가용차가 멎는다.
같은 방향이라면 태워줄 수 있는 것 같아 사정했더니 이 자동차 임자인 부인은 매우 반기며 『네, 태워드리지요. 전 지금친척집에 가는 길인데 만일 점심을 안 하셨으면 함께 가서 들도록 하시지요』한다. 차까지 태워주고 게다가 점심까지 함께 하자니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생판 모르는 사람네 집엘 어떻게 뻔뻔스럽게 가겠느냐고 사양했더니『아는 사람이 따로 있나요. 사귀면 다 벗이지요』하며 강제로 나의 옷소매를 잡아당긴다. 이 나라도 우리 나라처럼 이렇게 대접을 강요하는 습성이 있는가보다.
과연 우정의 제도라고 이름 붙인 탐험가 쿠크의 말이 옳아 보인다.
이 통가여성의 친척집엘 갔더니 온 식구가 나를 귀빈처럼 반기며 그들의 거실인 마루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얼마 뒤 식탁에는 이들의 주식인 고구마 같은 소담스러운 타로며 얌이 큰 바나나 껍질 위에 얹혀서 나오는가 하면 양념한 나물과 고기를 다져서 코코너 기름으로 무친 루풀루, 생선회, 그리고 새끼돼지를 통째로 군것(손으로 껍질부터 벗겨먹음)이 상에 올랐다. 그리고「디저트」로서는 길쭉한 수박을 길게 썰어 놓았는데 모두가 이 나라의 독특한 음식들이다. 구미가 절로 돌았다.
나를 데리고 온 이 여성이 주빈일텐데도 이 여성과 이 집 딸은 나를 복판에 앉힌다. 그리고 딸은 나에게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큰 부채로 연상 부채질을 해준다. 도리어 주빈인 그 여성보다도 나를 위한 향연이 되어버렸다. 이국 여성과 혼인식을 올리는 어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온 식구가 모두 날더러 이것 먹으라, 저것 먹으라 하며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집어 주기도하여 자꾸만 받아먹었더니 목구멍까지 찬 듯 더 먹을 수가 없었다. 하긴 나의 밥통은 사자나 구렁이의 위를 닮아서 포식하여도 거뜬히 소화시키는 아코디언 식이니 걱정은 없지만너무 많이 먹어 위의 부담이 큰지 사르르 졸음이 왔다.
이 집 딸이 『몹시 졸리시는가본데 한잠 주무세요』하더니 베개를 갖다 주었다. 그렇다고 벌렁 누워서 잘 수가 없어 괜찮다고 했으나 눕혀주기까지 하며 그 야자 선으로 부채질을 해 주었다.
운명의 생태랄까, 행운과 불운의 교차관계엔 매우 미묘한 리듬이 있다. 얼마 전 피지군도에서도 원주민의 환대를 못 받은 것은 아니나 산 속에 들어갔다가 큰 봉변을 당했었는데 그 대가랄까 이 통가군도에선 이렇듯 눈물겨운 대접을 받으니 말이다. 나는 운명논자는 아니지만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묘한 그 무엇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느꼈다. 나의 여로를 움직이는 것은 혹 운명의 여신 파르크 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통가의 시골집에서 대접을 받으면서 더욱 사무치게 느낀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비록 정복자의 권력으로 말미암아 이질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천성적인 아름다운 마음씨와 융화하여 가장 드높은 종교 선을 지니게된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이들은 정복자에 대하여 어떤 보복을 하지 않더라도 원광과도같이 빛 나는 이들의 종교에 정복자들이 도리어 감화를 받게될 것이라고 느꼈다. 이는 가장 위대한 대결정신이 되지 않을까.
이 집에서 후대를 받고 또 자가용차의 신세를 지고는 남태평양에서는 가장 훌륭한 파수의 묘기라는 블로·홀즈(Blow Holes)를 보기 위하여 이 섬의 서남쪽 해안으로 달렸다. 해안선 일대에서 20여m의 물기둥이 수백 수천 군데에서 하늘로 치솟는 것은 정말 장관이었다. 물기둥이 아닌 이불기둥의 움직임은 바다의 요정의 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스케일이 큰 해상의 무용이었다.
이것은 둘러싸인 산호초가 오랫동안 태평양의 거센 물결로 구멍이 뚫려서 닥쳐오는 파도가 이 구멍으로 치솟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구멍 속의 공기와 파도가 부딪쳐서 휘파람 소리 같은 미묘한 소리를 내었다. 그 옛날 원주민은 용감한 추장의 휘파람으로 잡귀를 물리쳤다고 믿었다는데 어쩌면 이 블로·홀즈의 소리가 그의 화신으로서의 수비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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