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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적치하의 3개월④|지하의시련(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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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수도 서울이 불과 3일만에 적에게 유린된다가 정부의 무계획과 무성의가 겹쳐 대부분의 시민들은 한강 이북에 그대로 갇히고 말았다. 적치 3개월 동안에 선량한 소시민이 겪은 온갖 고초와 곤욕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건국과 반공투쟁의 선봉에 섰던 각계의 저명인사와 정부고관들은 당장 목숨부터 살려야 할 판이었다.
북괴는 서울을 점령하자 곧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켜 수많은 「반대인사」들을 즉결 처단과 인민재판 등을 통해 살해 혹은 투옥했다.
그들은 또한 반대자색출의 한 수법으로 「자수」라는 교묘한「함정」을 마련했다. 즉 6월 30일에 북괴정치 보위부는 『과거의 어떤「죄과」가 있든지 간에 자수하는 사람은 관대히 처분한다』는 포고를 발표했다. 북괴의 이런 기만적 술책에 속아 은신처에 숨어있던 여러 인사들이 머리를 굽히고 자수한 비극을 빚어냈다. 전 내무장관 김효석, 청년방위단 고문 송호성 장군, 국회의원 조소앙 등이 먼저 자수했고, 뒤따라 여러사람들이 출두했지만 나중에 대부분이 납북과 학살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김현수 대령, 극약 세알 줘>
그러나 또한 여러 저명인사들은 북괴의 이런 자수권유에 끝내 응하지 않고 각고의 지하생활을 계속하다가 9·28수복으로 비로소 햇빛을 보았다. 적 치하에서 살을 깎는 이런 은신생활을 한 여러 인사들 중에서도 대한민국수립에 많은 공을 세웠고, 괴뢰군이 들어오기 전날인 27일 밤까지도 KBS방송을 통해 국군의 감투를 호소했던 모윤숙 여사(60)의 적치하 3개월의 체험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귀중한 교훈을 주고있다.
알다시피 공산당은 6·25 전해인 49년 3월 17일에 연세대 설립자「언더우드」박사부인을 살해할 때 모윤숙 여사도 함께 암살하려했던 정도로 모 여사는 북괴가 노리고 있는 A급 대상자였다.
『6월 27일 저녁에 나는 정동에 있던 KBS에서 정훈국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과 함께 방송을 하고있었어요. 김 대령은「맥아더」사령부가 내일(28일) 서울에 설치되니, 시민은 동요 말고 안심하라는 식의 방송을 했고 나는「국군은 잘 싸우라」는 애국시를 낭독했지요. 그때 이 방송을 믿고, 숱한 서울시민들이 정세판단을 그르쳐 피란을 못가고 무진 고생들을 한 거지요.
여하튼 그날 밤이 깊어오니까, 방송국 밖에서는 처음 듣는 총소리가 들려요. 총성이 점점 더 가까이 요란하게 들리자, 김 대령은 「모 선생, 먼저 빨리 피신하십시오」하면서 미색이 도는 하얀 약 6알을 내보여요. 김 대령은 「적에게 잡히기 직전에 이 약을 3알 먹으면 욕을 안보고 편히 죽을 수 있다」면서 3알을 나누어주더군요. 이것을 받아 넣은 다음 「파마」머리를 풀어 쪽머리 비슷하게 하고 수건으로 동여 변장을 하면서 방송국 정문을 나서는데 광화문에는 벌써 적「탱크」가 와 있어요. 옆길 골목을 따라 회현동의 집으로 달음박질을 쳤지요. 집에 들어가 보니까 괴뢰군이, 벌써 내 집을 한차례 습격한 뒤예요. 따발총을 난사한 모양으로 복도에 총알이 우박 쏟아진 것처럼 떨어져 있어요. 외동딸 경선(당시 13세)이는 다락 속에 숨어서 새파랗게 질려 있구요. 사신이 내 뒤를 바짝 뒤 쫓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지요.

<박순천 등 4 여인 체포특명>
이것은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김일성은 남에 가거든 네 여인은 꼭 잡으라고 괴뢰군에게 특명을 내렸대요. 임영신 김활란 박순천,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지요.
6·25 전해에도 북괴는 3명의 자객을 밀파, 나를 암살하려고 했는데 내 옆에 앉았던 연대의 「언더우드」박사 부인이 변을 당한 것은 다 아는 이야기구요. 그래서 그때부터 경찰에서 나에게 경호원 1명에다, 운전수와「지프」를 붙여 주었읍니다.
내가 공산당의 원수일 수밖에 없는 것은 건국 전에 「유엔」한위의장「K·P·S·메논」 씨(인도인)를 이승만 박사 편을 들게 하는데 큰 몫을 했고, 또 조병옥 박사 등과 함께 「파리」의 47년 「유엔」총회로 하여금 한국 정부를 승인토록 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죠. 사실 「메논」의장은 처음에는 한국의 지도자로 김규식 박사를 추대하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공산군에 잡히면 그 자리에서 끝장이 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어요. 내 경호원은 벌써 도망치고 집에 없어요. 나는 급히 지하실에 들어가서 평소에 저명인사들로부터 받은 편지뭉치를 땅에 파묻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춘원 이광수 선생과 영문학자 장기제씨로부터 받은 편지 7통만 가슴에 간직했어요. 이 편지는 그 내용과 문장이 아주 아름답고 좋아서 나중에 출판하려고 아끼던 것이예요.

<국군포로 학살장면 목격>
춘원선생의 서신은 교훈적인 것이 많았고 장씨 것은 연문이었어요. 「오스커·와일드」를 전공한 애꾸눈의 장씨에 대해 나는 그분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글만은 퍽 소중히 여겼읍니다.
28일 새벽 4시쯤 편지 7통, 돈 3천원 그리고 김 대령이 준 극약 세알을 허리춤에 넣고, 팔목에는 「메논」의장이 기념으로 준 금시계를 차고 남산쪽으로 올라갔습니다. 20m쯤 뒤에는 딸 경선이와 운전수 김씨를 따르게 하구요. 거리를 두고 딸을 뒤따르게 한 것은 우리 모녀가 함께 가다가 잡히면 다 죽으니까, 내가 잡히더라도 딸만은 살리고 싶어서였읍니다.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 나딴엔 단단히 변장도 하고요. 남산에 올라갔다가 신촌의 김활란 박사 댁으로 가려고 남대문쪽으로 내려올 때입니다. 몸서리치는 광경이 벌어졌어요.
북괴군 대열이 「오토바이」틀 타고 노도광풍처럼 깃발을 흔들며 호기있게 행진하고 길가에는 시민들이 어느새에 마련했는지 적기를 흔들며 환호하고있어요. 어제까지 태극기를 든 대한민국의 시민이었던 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변해 북괴 만세를 부르다니…참 기가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집디다. 서울시민의 무서운 변절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려요. 그리고 서울역쪽에서는 국군포로 약 2백명에 대해 무시무시한 학살을 벌이고 있구요. 서울역 본관으로 들어서면서 오른쪽에 석탄더미와 창고가 있는데 따발총으로 마구 난사해서 시체를 창고 속에 처넣어요.

<애독자집서 3일 피신>
경에게 「엄마가 잡히거든 너는 빨리 도망쳐야한다」고 단단히 일러두고는 역시 모녀가 거리를 두고 걸어 그날 저녁에 마포 강변에 도착했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수원이나 대전으로 정부를 따라갈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어디 배가 있어야지요.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웬 청년이 다가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모윤숙 선생이시죠」하고 물어요. 가슴이 철렁 내 려 앉으며 대답이 안나와요. 그랬더니, 그 청년은 「나는 체신부 기계과 직원 김재헌인데 아주머니 시를 늘 애독하곤 했습니다」라는 거예요. 그제서야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자기집 다락에 숨겨 줄테니 같이 가자고 해요. 김씨는 국군이 곧 반격해 들어 올테니까 염려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 집 다락에 숨고 경이와 운전수는 마루에서 자면서 3일을 지냈지요. 그런데 기다리는 국군은 안 오고 동네마다 인민회의를 하느니, 인민재판을 하느니 하고 웅성대기 시작했어요. 사태가 이렇게되니까, 김씨는 자기도 살아야하니 제발 나가달라는 거예요. 3일 동안 숨겨준 것만도 고마와서 인사를 하고 이대 총장 김활란 박사 댁을 향해 나섰읍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짓이었지요. 김 박사 댁 입구에 도착해보니까, 북괴군이 꽉차서 법석거리며, 된장을 퍼 가는 등 세간을 옮기고있어요. 겁이 덜컥나서 이대 뒤쪽의 애기산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날이 7월 1일인지 2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해가 진 다음 운전수 김씨를 시켜 신촌에 있는 친구 N여인(고인)집에 가서 적삼 두벌과 먹을 것을 좀 얻어 오라고 했어요.

<먹을 것 부탁한 친구가 밀고>
30분쯤 있다가 김씨가 맨 손으로 헐레벌떡거리며 올라오는데 겁에 질린 얼굴이예요. 운전 수 말인 즉 N여인이「윤숙이 있는 곳을 대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내무서에 집어넣겠다」 고 으름장을 놓더래요. 엉겁결에「이 뒷산에 있다」고 고지식하게 알으켜 주고 도망쳐 오는 길이라는 겁니다. N여인으로부터 처음 받는 배신에 이럴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디 다. 같이 시를 쓰는 문단의 동지요, 이화전문 영문과의 3년 후배이며, 다정한 친구인데… 더우기 6월 24일엔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내「지프」로 바라다 주기까지 했거든요. 좀 있으니까 마이크 소리가 산 아래에서 들러와요. 「이 산에 모윤숙이란 중범인이 숨어있다. 보는 대로 신고하라」는 내용의 방송이예요. 그리고 벌써 그자들이 산을 포위했어요. 물론 N여인의 밀고로 그자들이 동원된 거지요.

<"평양서 왔당이" 여맹원 행세>
새절(사)쪽으로 내려오는데 괴뢰군이 「플래쉬」를 비추며 불러요. 이젠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두 녀석은 칼을 뽑아들고 있고, 한 녀석이 천연색사진 한장을 내보이며「아즈마, 이런 여자 이 산속에서 못봤는가요」라고 함경도 사투리로 묻는 거예요. 들여다보니까 47년에 내가 조병옥 박사 등과 함께 「파리」의「유엔」총회에 참석했을 때 찍은 사진에서 내 얼굴만 오려낸 거예요. 회현동집을 나올때 2층방에 수십장있던 기념사진을 그냥 두고 온것을 이자들이 벌써 오려 가지고 나를 사진수배하고 있는 것이죠. 발가락서부터 머리끝까지 덜덜 떨려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자는 나를 빤히 들여다보면서「왜 이렇게 떠느냐」고해요. 가만히 심호흡을 한번하고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아, 해가 지니 이 모시적삼 하나입고 춥지 않능기요」라고 했더니, 또 사진을 들이대며 「이런 여자, 못 봤느냐」 는거예요. 「모르오. 나는 여맹원인데 평양서 왔당이.」함경도 사투리로 시침을 뗐지요. 어릴때 함흥에서 10년간 살았기 때문에 그 지방 사투리는 잘 알거든요.「그럼 빨리빨리 갑세」하며 손을 저읍디다. 이렇게 해서 적치하의 제1차 호구는 벗어났읍니다.』

<차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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