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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만난 마오쩌둥 “싸우다 지치면 친구 되는 법”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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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山西)성 다자이(大寨)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집단농장이 있었다. 문혁 시절 장칭은 다자이를 수시로 찾았다. 언론기관을 장악하고 있던 4인방에게 농민들과 함께하는 장칭의 모습은 좋은 선전거리였다. 1976년 9월 초, 마오쩌둥 사망 직전에도 다자이를 방문했다. [사진 김명호]

1971년 가을에 들어서자 마오쩌둥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심장 발작이 자주 일어났다. 최고의 의료진이 진땀을 흘리고,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회복이 됐지만 그것도 한두 번, 해를 거듭할수록 증세가 심각했다.

본인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1975년 4월 18일,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평소에 안 하던 말을 했다. “둥비우(董必武·동필무)가 죽고, 총리는 병중이다. 내 나이 여든둘, 몸도 못 가눌 날이 멀지 않았다. 그때는 너희들에게나 기대겠다.” 현장에 있었던 두슈셴(杜修賢·두수현)에 의하면 그렇게 비장하고 처량해 보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2개월 후 심장병이 재발한 후부터는 음식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그래도 책은 놓지 않았다.

1976년 2월,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다. 마오쩌둥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한 닉슨을 국가원수로 예우했다. 직접 만나 1시간40분간 대화를 나눴다. 목이 막히면 종이에 하고 싶은 말들을 써내려 갔다.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83세 노인의 기억력과 사고는 경이로웠다. 4년 전 겨울, 처음 만났을 때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거론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미국 국내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국제문제 분석도 명쾌했다.

평생 논쟁을 즐긴 마오쩌둥은 이날도 수십 년간 적대시하던 미국의 전직 대통령과 논쟁을 벌였다. 헤어질 무렵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손에 힘이 없어 보였다. 건배 제의를 눈치챈 닉슨도 찻잔을 높이 들었다. 마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했다. “우리는 수십 년간 바다를 사이에 두고 원수처럼 지냈다. 원수 진 집안이 아니면 머리 맞대고 의논할 일도 없다. 원래 싸우다 지치면 친구가 되는 법이다. 서로를 위해 건배하자. 이제 나는 술을 못 마신다.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술이 없지만 물은 있다. 물로 술을 대신하자.” 닉슨과 수행원들은 마오의 매력에 흠뻑 취했다. 닉슨도 마오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며 화답했다. “세상에 어려운 일은 없다. 등산하듯이 한 발 한 발 기어오르면 된다.”

닉슨 회견 직후부터 건강이 악화됐다. 3월 8일 오후, 지린(吉林)성에 운석이 떨어졌다. 지면 19㎞ 상공에서 폭발한 3000여 개의 운석 덩어리가 시골 마을을 덮쳤다. 177㎏짜리도 있었다. 전속 간호사가 운석 소식이 실린 신문을 마오쩌둥에게 읽어줬다. 한참 듣던 마오는 간호사를 제지했다. “그만 읽어라. 듣고 싶지 않다. 천지가 요동칠 징조다. 하늘에서 돌덩어리기 떨어지면 사람이 죽는다. 삼국지를 보면 제갈량과 조자룡이 죽을 때도 그랬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4월 30일, 뉴질랜드 총리를 만난 후, 배석했던 화궈펑을 붙잡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종이 3장에 뭔가 써서 건넸다. “천천히 해라. 급하게 서두를 필요 없다.” “네가 일을 처리하니 안심이다.” “예전 방침대로 하면 된다.”

5월 27일 밤, 화궈펑이 파키스탄 총리 부토를 마오쩌둥의 서재로 안내했다. 부토는 10분 만에 자리를 떴다. 마오의 두 손을 잡고 건강 회복을 기원했다. 부토가 베이징을 떠난 후 중국 정부는 “외빈들의 주석 접견을 불허한다”고 대외에 공포했다. 화궈펑을 비롯한 정치국원들은 돌아가며 병실을 지켰다.

마오쩌둥은 통증을 견디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독서만 한 진통제는 없었다. 손에 힘이 빠지면 의사와 간호사가 대신 들고 책장을 넘겼다. 눈이 피곤하면 간호사에게 읽으라고 손짓했다. 눈에 피로가 풀리면 다시 책을 읽었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그럴 기세였다.

사망 2개월 전, 마오쩌둥은 고향산천이 그리웠다. 어린 시절 뛰어 놀던 곳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중앙정치국은 토론과 연구를 거듭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함부로 의견을 내지 못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은 병실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예젠잉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안 가는 곳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주석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마오의 사망에 대비했다. 9월 1일 밤, 측근들과 긴급회의를 열었다. 예젠잉과 덩샤오핑 외에 화궈펑을 처음 거론했다. “일단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다가 처리하자. 주석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너희들이 있으면 나는 없어도 된다. 내일 다자이(大寨)로 가겠다. 밑에서부터 여론을 조성할 생각이다. 내가 없는 동안 사람 감시를 철저히 해라.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수시로 알려라.”

2일 새벽, 장칭은 병중의 마오쩌둥을 뒤로했다. 호화 전용열차에 한 무리의 측근과 연예인, 작가들을 데리고 다자이로 떠났다. 농민들에게 보여줄 외국영화 필름과 백마 4마리도 손수 챙겼다. 측근들의 만류도 뿌리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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