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한가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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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호 04면

추석 연휴 전날 귀향을 앞두고 기분 좋게 취한 우리의 철수씨. 건물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깜빡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정신이 드니 건물은 밖에서 잠겨 있고, 휴대전화 배터리는 방전됐고, 건물 내 사무실도 모두 닫혀 있어 전화도 쓸 수 없는 상황. 차례를 지내야 할 장손이었기에 조바심이 났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꼼짝없이 갇혀 수돗물로 허기를 달랠 수밖에.

배고픔에 지쳐 가던 그에게 백화점 추석 맞이 광고 전단이 보입니다. 군침을 삼키며 전단을 바라보던 철수씨는 문득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죠. 사과와 배, 참조기와 한우 갈비 세트 사진을 하나씩 조심스레 찢기 시작합니다. 펼쳐놓은 신문지 위에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 어동육서(魚東肉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원칙에 맞춰 올려놓고는 큰절을 올리며 말합니다. “이렇게 갇힌 덕분에 올해는 평소 못 올리던 비싼 걸로 차례상을 차렸습니다. 조상님, 많이 드세요.”

몇 년 전 TV에서 우연히 본 시트콤 에피소드 한 토막입니다. 제가 장손이라 그런 걸까요. 신기하게도 해마다 추석이 되면 머릿속에서 이 장면이 재생되곤 합니다. 단순히 웃어넘길 수 없는, 마음을 흔드는 무엇인가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후손의 마음 씀씀이에 감읍한 조상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곧 추석입니다. 지갑은 얇아졌지만 그런 마음과 정성으로 차례상을 차려야겠습니다. 충만한 한가위 맞으세요. 저희는 한 주 지나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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