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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우윳빛에 풍만한 몸체 … 절정의 원숙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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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호 14면

국보 제309호인 백자대호. 보름달같이 동그란 아름다운 원형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백자 항아리는 사발·접시·병 등과 함께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그릇이다. 용도에 따라 일상생활에 쓰는 것과 제사나 잔치 같은 예식에 사용하는 그릇으로 구분된다.

조선 달항아리의 미학

예식에 쓰인 항아리는 단정한 형태와 유색으로 엄숙한 느낌을 준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는 거울이라고 생각될 만큼 옆에 두고 보기 위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무늬가 없는 백자 항아리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많이 만들어졌다. 15, 16세기의 항아리는 입이 밖으로 말렸거나 안으로 숙여 세워진 형태에 몸체가 어깨에서 벌어져 풍만하고 안정감이 있다. 17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전의 형태를 이은 것과 새로운 둥근 항아리가 크고 작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18세기에 만들어진 달항아리는 입이 은행알처럼 예각으로 깎이고 몸체가 둥근 달처럼 풍만해 원숙함이 드러난다. 유색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유백색, 설백색을 띠며 둥근 몸태와 함께 조선 조형미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세기에 이르면 목이 더욱 높이 세워지고 몸체가 길어진 고구마형에 유색은 청백색을 띠게 된다.

이 중 18세기 전반 숙종과 영조 연간에 걸쳐 주로 만들어진 달항아리는 흰색과 둥근 맛에 있어 가장 원숙한 느낌을 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충만한 느낌의 달항아리가 나올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일까.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에 이은 병자호란으로 사대부들이 이루었던 모든 것을 전쟁으로 잃어버린 시기였다. 더 큰 충격은 청나라의 등장이었다.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학의 가르침을 준 나라는 명이었는데, 주인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중국(명)이 사라지자 “이제 (오랑캐 나라 청이 아닌) 조선이 중국이다”라는 움직임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18세기 전반에 걸친 조선의 회화, 특히 겸재 정선(1676~1759)이 추구했던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조선을 소재로 한 그림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실학(實學)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로 역사·경제·사회·문화 등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재발견을 추구했다. 춘향전·흥부가 같은 소설과 판소리, 또 목기와 옹기도 이때부터 새로이 만들어진 것으로 오늘날 한국적이라 하는 세계의 뿌리가 발현된 것이다.

도자기의 경우 18세기의 중국은 백자 위에 에나멜로 이른바 삼채(三彩), 오채(五彩) 등의 화려한 채색 자기를 만들었다. 일본도 그것을 똑같이 따라 해 만든 채색 자기를 유럽에 수출했다.

그러나 조선은 그것이 모두 오랑캐 짓이라 여기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가장 조선적인 담백한 순백자의 풍만한 항아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 제작의 중심은 왕실용 도자기를 만들던 경기도 광주 금사리(金沙里) 가마였다. 숙종 35년(1709)에 분원에 머물며 항아리 제작 과정을 지켜본 담헌 이하곤(1677~1724)이 두타초(頭陀草) 권3에 적은 시의 내용은 이렇다.

“…선천토(宣川土) 색상은 눈(雪)과 같아서 어기(御器) 번성(燔成)에는 제일이라…수비(水飛)하여 만든 정교한 흙은 솜보다 부드럽고 발로 물레 돌리니 저절로 도네/ 잠깐 사이 천여 개를 빚어내니 사발·접시·병·항아리 하나같이 둥글다네.”

금사리 가마는 1726년께부터 1751년까지 25년간 도자기를 구워냈다. 유백색ㆍ설백색의 백자를 바탕으로 풍만하게 둥근 달항아리를 비롯, 굽이 높아진 각종 제기와 면과 각을 다듬은 다양한 항아리와 병이 등장했다. 청화로 간결하게 번초·패랭이·들국화 문양을 그린 청초한 청화백자도 제작됐다.

일제 강점기 시절 ‘민예운동’을 주창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1889~1961)는 일찌감치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간파했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조선 백자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1 조선 백자를 소재로 한국적 고전주의와 아카데미즘을 일군 도천 도상봉의 ‘항아리’(1953). 2 수화 김환기의 유화 ‘항아리와 매화’(1954). 3 다나 에스테이츠의 와인 ‘바소(VASO)’ 레이블. 사진작가 구본창의 달항아리 사진을 활용했다. 바소는 이탈리아어로 항아리란 뜻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김환기ㆍ도상봉 같은 화가들에 의해 그 아름다움이 재발견됐다. 특히 수화 김환기 화백은 백자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6·25 때 피란을 가서는 서울에 백자를 두고 온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수필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는 “글을 쓰다가 막히면 옆에 놓아둔 크고 잘생긴 백자 항아리 궁둥이를 만지면 글이 저절로 풀린다”고 했을 정도다. 1953년 5월 파리에 있는 건축가 김중업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코리아는 예술의 노다지올시다.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이제 전 세계 예술은 그 주제가 우리 코리아에 있다는 말이오…르 코르뷔지에 건축 또는 정원에다 우리 조선조 자기를 놓고 보면 얼마나 어울리겠소…”라고도 했다.

이뿐이랴. 달항아리는 최순우ㆍ김원룡에 의해 한국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부각됐고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잠실 올림픽 경기장이 달항아리의 선과 같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도자기 작가인 한익환ㆍ박영숙에 의해 재탄생되었다. 2005년 문화재청과 국립고궁박물관이 힘을 합쳐 마련한 백자 달항아리 특별전은 온 국민이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이 무렵에는 일본에서 들어온 달항아리 세 점이 국보로 지정됨으로써 조선 백자의 원숙함이 재삼 주목받는 계기가 마련됐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309호인 ‘백자대호’는 높이가 44.5㎝, 구경이 21.5㎝, 저경이 16.5㎝로 옆에서 보기에 둥근 보름달 같은 아름다운 원형을 자랑한다. 보통 높이가 40㎝가 넘는 것을 달항아리라 부르는데, 몸체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인 다음 높은 온도에서 굽기 때문에 대개 접합 부분이 변형되어 의도된 둥근 형태가 나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렇게 실제 생활에 쓰기 위한 견실함, 장식이나 기교가 없는 단순함, 우윳빛의 유백색이 주는 담백함이라는 특징을 지닌 조선 백자 항아리의 세계는 보면 볼수록 더욱 가까이 가고 싶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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