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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제프리·초서 저 『캔터베리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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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문학이 언제부터 시작됐는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이를테면 근대·현대 영문학이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데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초서는 14세기 후반에 산, 전형적인 영국인이었다. 궁정인이었고, 외교관이었고, 한 때 선량으로 국회에도 나가고, 세관에서도 일했다.
그의 학식과 교양이 또 그의 경력만큼 다채로왔다. 중세기 지식인들이 즐겨 읽던 모든 고전을 읽었고, 프랑스의 『장미의 로망』이 대표하는 문학에 정통했고, 일찍부터 프랑스의 시문을 읽고 모방하는 것으로 문학수업을 했다. 영국보다는 훨씬 앞서서 문예 부흥의 기운이 싹튼 이탈리아에도 가보고, 단테니 보카치오니 하는 작가들의 작품에도 접하는 행운을 가졌다.
초서는 탁월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뛰어난 스토리·텔러였다는 것이다.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상당한 수효의 이야기가 수록되어있다. 물론 그 모두를 초서가 지어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캔터베리로 가는 순례자들을 묘사하는 그의 수법에서 우리는 대단히 풍성한 그의 휴머니즘을 엿볼 수 있다.
그 순례자들의 입을 통해서 독자에게 제공되는 각가지 이야기는 초서의 온유하고 너그럽고, 슬기로운 인생관의 여러 단면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캔터베리 이야기』전편에서 독자는 유머라는 것을 여러 면에서 감상할 수 있다. 초서를 가리켜서 『영시의 아버지』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리고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문학이란 시가 그 핵심을 이룬다. 또 영국인들은 셰익스피어를 극작가가로 부르지 않고 시인이라고 부른다.
결국 영국인들에게는 시와 문학은 동의어이며 그런 의미에서 초서는 영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영문학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연면히 이어오는 유머의 전통은 바로 초서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유머를 모르고 영문학을 이해하거나 즐길 도리는 없다. 그렇다면 초서를 모르거나 읽지 않고 영문학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초서의 유머는 때로 익살맞고, 때로 우스꽝스럽고, 때로 은근하고, 또 때로는 신랄하다. 그는 더할 바 없이 관대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사회의 악과 모순과 불의와 부정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글의 구구절절에 풍자가 어려있다. 다만 그의 풍자는 그와 같은 부조리를 폭로하고, 고발하고, 제거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 들여서 그 속에서 인간의 허약을 보고 비통이나 비관이 아닌 여유 있는 해학으로 그것을 관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기에 초서의 문학은 독살스럽거나 쓴 뒷맛이 없고, 인간-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한 동찰을 더욱 깊게 하여 주고, 인간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효용이 있다.
인간의 장점뿐 아니라 인간의 단점과 약점마저를, 관용과 사랑으로 반성하게 해주는 효용이 있다. 그러기에 초서의 문학은 작가이며 그의 대표작인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문학의 거작인 것이다. <정음사간 고전문학 전집> [김진만<고대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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