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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동원·홍순지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배화여고의 깜찍한 소녀가 연희전문 음악「콩쿠르」에 나갔다가 배재 고에 재학중인 한 미남학생의 독창에 가슴이 뛰었다.
『옆 친구들이 연극도 잘하는 미남이라고들 야단이었죠. 저는 그때 벌써 이분을 알고 있었어요.』김동혁(김동원씨의 본명)학생은 홍순지 양의 오빠와 동기동창. 그 오빠를 통해 서로가 은근히 알고 있는 사이였다. 30년도 훨씬 전의 일이었다.『그렇다고 연애를 한 건 아니고 그 몇 년 뒤에 아는 분의 중매로 결혼을 했습니다.』- 김동원씨(54)의 말이다. 그는 해방과 함께 예명을 바꾸고 연극을 다시 시작했다. 동경유학(일본대 예술학과)때「동경학생 예술 좌」를 꾸며 연극을 하다 일경에 잡혀 옥고를 치렀던 그는 해방될 때까지 쭉 연극활동을 금지 당했었다. 그래서 결혼식을 했던 1941년 당시엔 경성방직에 근무하고 있었다.
『올해로 결혼생활 30년째 접어들지만 신기 할이 만큼 풍파가 없이 지냈어요.』김씨는 연예인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애처가.
『내가 배우를 시작 할 때엔 배우라는 직업이 사회적 멸시를 받고 있었어요. 집에서는 의사를 시키려고 무척 반대했었지요. 그렇지만 나는 내가 좋은 길을 택했어요. 배우가 사회적으로 대우를 못 받는 원인은 바로 배우자신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할 때 무엇보다 가정적으로 행복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그의 이런 결심은『고맙게도』아내와 또 늘어나는 자녀들로부터 도움과 격려를 받아 오늘의 다복한 가정을 키웠다.
『딸을 두지 못한 것이 좀 불만이지요. 그렇지만 며느리를 볼 테니까.』홍 여사는「다복」의 의미를『남편이 아내를 믿어 주는 것』을 그 첫째로 꼽았다.
『두 사람이 서로 믿는다는 것이 정말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믿게끔 성실해야지요.』김씨는『자식들 앞에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서로가 성실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맏아들 덕환씨(27)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를 나와 금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했고 2남 성환군(24)은 한양대 공대 건축과 4년, 3남 세환군(22)은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3년,『하나같이 부모의 말을 잘 듣는』아이들이다.
『제가 복이 많은가봐요』홍 여사는 6·25때 인민군에 끌려 북으로 갔던 남편이 탈출하여 집으로 들어 왔을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외모는 작지만 남자이상으로 마음이 넓고 씀씀이가 원만하여 내가 살림 걱정하는 경우는 없어요.』아내에 대한 든든한 마음이『10이 생겨도 맡기고 다시 타 쓰는 생활』을 즐겁게 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술을 못하는 김씨는 될 수 있으면 집에서 모든 일을 한다. 또 아들들도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함께 지내도록 음악도 들려주고 친구들도 초대한다.
『엄한 것보다 관대하게, 가정교육은 자식들 앞에서 거슬리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삼고 있다.
대본을 집에서 연습할 때는 홍 여사가 상대역으로 대사를 읽어 준다. 연극에 대해서는 홍 여사도 일가견을 갖고 있을 정도.
『매서운 비평가』라고 김씨는 아내를 가리켰다. 특히「러브·신」에 대해선 항상 혹평을 못 면한다고『어색하다』『실감 있게 하라』는 채찍을 항상 받고 있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햄릿」만은 절찬을 받았다고 한다.
해마다 12월26일 결혼 기념일이 오면 두 사람은 집과 3형제를 떠나 그 옛날 신혼여행을 했던 온양으로 내려가 한해를 오붓하게 마감하는『정기여행』을 즐기는 것이 가장『행복한 순간』이라고 했다. <윤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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