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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아홉 번 덖는다? 이야기 담긴 우리 차로 정담 나누는 한가위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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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계절은 어김없다. 이젠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니 따스한 차 한잔이 그립다. 문득 차를 가르쳐준 스승인 고 양함기 선생이 떠오른다. 일제에 항거해 동맹휴학이 한창이던 1930년대 중앙고보에 다니다 “공부할 사람은 공부해야 민족의 미래가 있다”는 현상윤 교장( 광복 뒤 고려대 초대 총장)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떠나 의사가 된 분이다. 그분이 생전에 차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을 들려준 적이 있다.

 “경남 함양에 살던 조부께서 봄이 오자 하인을 시켜 소 두 마리를 앞세우고 길을 떠나셨어. 나도 따라갔지. 먼저 하동 차밭에 들러 찻잎을 따고 덖는(차 가공 과정) 과정을 일일이 보면서 차를 사셨어. 차 값으로 소 한 마리를 치렀고. 그런 다음 무등산 자락의 그림 그리는 허 선생 댁에 가서 차를 나눠 마시며 시 짓고 글씨 쓰고 시조도 하며 한 달쯤 지내다 그림 몇 점을 들고 돌아오셨어. 차 몇 통과 남은 소 한 마리를 그 댁에 드리고 셋이서 걸어서 돌아왔지. 그림 두루마리를 등에 지고 지리산을 넘는 하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네.”

우리 차에는 이처럼 한 폭의 그림 같은 사연이 담겨 있고 유구한 역사가 깃들어 있으며 속 깊은 문화가 녹아있다고 할 것이다.

 마침 올해는 운 좋게도 차에 대한 추억을 세 가지 만들 수 있었다. 지난 6월 충남 서산의 부석사에 템플스테이를 갔을 때는 주지인 주경 스님이 우려낸 깔끔한 녹차에 피로가 풀리며 마음이 차분해졌다. 일행에게 “첫 잔은 향으로, 둘째 잔은 맛으로, 셋째 잔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며 차를 돌리던 스님의 두꺼비처럼 여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절집 차 맛은 여운이 유난히 길었던 서산의 석양, 칠흑 같은 산사의 밤과 더불어 두고두고 편안한 기억으로 남았다.

 지난달엔 비 오는 날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부드러운 발효차를 만났다.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차와 서예, 전통예절과 실학정신을 가르치는 분들이 비 맞은 길손에게 내놓은 차 덕분에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얼마 전엔 친구가 ‘아홉 번 덖음차’의 명인이라는 묘덕 스님이 만든 전통차의 감칠맛을 보여줬다. 입안에 온통 군침이 돌더니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차야말로 한국의 전통이요, 문화요,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말에 집안 명절선물을 살피러 시장에 들렀다. 차를 찾았더니 구색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커피 바람에 밀려서라는 게 직원의 말이었다. 밀리는 건 차가 아니라 우리네 마음의 여유이고 고유의 음료 문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 한가위엔 이야기가 담긴 차를 마시며 오롯이 정담을 나눌 수 있도록 소중한 분들에게 우리 차를 선물해야겠다. 한가위가 딱 보름 앞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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