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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제2본영... 수원(3)|「6.25」20주... 3천여의 증인 회견. 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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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맥아더」원수가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그 이튿날인 6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군 최고 지휘부의 이동을 단행했다. 바로 이날 아침 미국에서 급히 돌아온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승진시켜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한편, 채병덕 소장은 부산 제4지구 계엄사령관이란 한직으로 전보 발령했다. 이로써 정일권 소장은 한국 육·해·공군 전체의 지휘권을 갖게 된 것이다.

<회원들 국방. 내무 경질요구> 수도 서울이 불과 3일만에 적 수중에 들어가자,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었다. 이런 여론은 주로 국회의원들 안에서 비등했고, 화살은 신성모 국방을 비롯한 군 수뇌에 집중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서범석 의원 (현 국회의원·신민·69)으로부터 잠깐 들어보면‥..
『29일 아침에 대전에서는 의원들의 과반수가 모이지 않아 국회는 구성되지 못했지만 간담회를 열어 이 대통령의 출석을 요청하고 시국수습 방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지요. 나는 이때 수습방안으로 우선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의 경질을 요구했읍니다. 국민을 기만한 책임자는 물러나게 해서 놀란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강물을 건너다 말을 갈아 탈수야 없지 않느냐」고 내 주장을 거부했어요. 그래서 내가 다시 이를 반박하자 이 대통령이 몹시 화를 냈읍니다. 나는 국회만 성원되면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려고 했는데 대전서는 끝내 국회가 성립 안됐지요.』
29일 아침의 이 대통령 태도가 이랬던 만큼 30일의 인사는 전격적인 동시에 일반의 예상을 뒤엎은 것이었다.

<맥아더 내한 후 총장 경질> 여러 유력한 증인들은 이 인사를 그 전날에 있었던 「맥아더」의 내한과 결부시켜 원수가 정일권 장군을 적극 추천했을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증인은 자기가 「맥아더」전방지휘소 사령관인 「존·H·처치」준장과 원수자신에게 정 소장을 적극 밀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은 별로 믿을만한 이야기가 못된다.
태평양전쟁 때 미 육군 전략정보국 (OSS) 대원으로 참전했으며 「맥아더」와도 안면이 있는 장기영씨(당시 체신장관·67)는 『원수 성품으로 보아 한국군 인사에 개입할 분이 아니며 참모총장 경질은 이 대통령의 독자적 구상이 틀림없다』면서 그러나 이 대통령이나 미 고위장성들이 모두 정일권 장군을 아끼고 좋아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의 증언과 이 대통령의 독특한 정치적 「머누버링」으로 미루어보아 대통령이 독자적인 생각에서 어차피 수도 실함의 군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만큼 우선 채 참모총장을 해임시킴으로써 민심 수습올 꾀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국군 최고지휘부의 경질은 때가 때인 만큼, 그리고 신·구임자가 서로 호형호제의 친한 사이인 만큼 몇 가지 기록에 남을만한 일화를 남겼다.
먼저 채 총장의 극적인 해임경위는 바로 이 대통령이 총장에게 보내는 해임 친서를 가지고 갔던 국방장관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 (당시)으로부터 들을수 있다. 『30일 아침나절에 신 장관이 불러서 갔더니 두툼한 편지봉투를 내보이며 채 총장한테 꼭 전하라고 해요. 대단히 중요한 편지니, 실수 없이 가지고 가라는 거예요. 대전서 「지프」를 타고 그때 이야기로는 육본이 시흥에 있다기에 그곳으로 달렸읍니다. 도중에서 적 「야크」기가 한대 떨어져 불타는 것을 보았구요.

<이중봉투에든 해임 통지서> 시흥에 갔더니 채 총장이 수원에 있다는 겁니다. 다시 되돌아 차를 달려 「맥아더」사령부 전방지휘소가 자리잡고 있는 수원농대에서 채 총장을 만나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편지 속에 무슨 중대한 작전 명령같은 군 기밀서류가 들어있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봉투가 이중이었어요. 겉봉투는 국방장관 신성모로 돼있었는데 그 속에 이승만대통령의 친서가 또 들어있더군요. 채 총장도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대통령 친서를 뜯어보더군요.
나도 옆에서 대충 보니까, 분명히 해임 통고예요. 참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채 총장은 한동안 멍하고 있더니 그 대통령 친서를 도로 나에게 던져 주더군요. 나는 그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아무말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나 대전으로 돌아와서 신 장관에게 복명을 했읍니다.』

<정일권 장군에 귀국 독촉> 한편 정일권 장군이 이 대임을 받게된 경위도 이채롭다. 미국에서 참모학교에 유학중인 정 장군에게 귀국조치를 취한 것은 6.25나기 약 한달 전인 5월23일께였다. 기록을 보면 23일에 장경근 국방차관은 『국내의 긴급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정일권 준장에게 귀국조치를 취했으며 6월중으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국방부에서 정 장군에게 어떤 요직을 맡기려고 했는지 또한 긴급한 국내사태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여하튼 6·25전에 이미 귀국 길에 올랐던 정일권 장군은 적 남침으로 「하와이」에서 부랴부랴 수원을 거쳐 대전에 도착한 것이 바로 30일 아침이었다. 이때 모습을 한 증인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김병삼씨(당시 국방장관 부관·헌병 대위·현 경성중고교 이사장겸 교장·48)『신 장관은 대전에서 대통령을 몇 번 만나본 후 정일권 장군의 귀국을 몹시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독촉 국제전보도 한 두 번 쳤구요.
30일 아침에 수원에 비행기로 착륙한 정 장군이 그 길로 대전역에 도착했읍니다. 정 장군은 보라복 차림으로 기차에서 내리면서 마중나온 사람들에게「어떻게 된 일이냐」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더군요. 그 길로 정 장군은 신 장관과 함께 이 대통령이 머무르고 있는 이녕진 충남지사 관사로 직행했는데 얼마 안있다가 장관으로부터 참모총장의 경질을 발표하라는 명령이 내렸읍니다.

<대통령 만난 직후 발령 공표> 나는 신문지나 양면괘지에다 「잉크로 정일권 장군의 3군 총사령관 취임을 마구 써서 대전시내에 붙였습니다. 물론 방송으로도 알렸구요.』
대통령으로부터 3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이란 대임을 받은 정일권 소장은 친서임명장을 안 호주머니에 넣은 채 즉시 전선으로 향했다. 자기선배며 다정한 천구인 채 총장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리느냐가 큰 고민이었다.
정 장군은 이보다 앞서 국방장관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이 채 총장에게 대통령의 해임친서를 이미 전달한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으로 부터도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이때의 미묘하고도 어색했던 상황을 정일권 총리(53)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알다시피 채 장군과 나는 일본 육사시절부터 막역한 친구로서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지요. 그러므로 나는 인간적인 의리로 보아서도 진심으로 채 장군이 계속 국군을 지휘해주기를 바랐읍니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정말 뜻밖에 대임을 내가 맡게 돼서 아주 송구스러웠지요.

<채 총장 잠 깨워 신임 알려> 임명을 받고 곧장 대전을 떠나 수원을 거쳐 시흥으로 가서 채 장군을 만났읍니다. 그런데 막상 말이 나오지 않아요. 둘은 그대로 「지프」를 타고 한강전선을 몇 바퀴 돌며 시찰하고 돌아왔지요. 벌써 저녁이 다 되어 같은 막사에서 밥을 먹고 드러누웠지요. 채 장군은 전화기를 손에 든 채, 이내 코를 골며 깊은 잠이 들었지만 나는 통 잠이 안와요. 내일이면 형식적이나마 이 취임식을 해야할 터인데 이일을 어떻게 알리느냐, 참 큰 고민이었읍니다.
한참 있다가 할 수 없이 채 장군을 깨워가지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지요. 처음에는 좀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채 장군은 이내 내 손을 잡으며 「참 잘됐소. 나는 보다시피 신심이 다 지쳤소. 힘껏 뒷받침 할터이니 잘 해 보시오」라고 해요. 우리는 서로 손을 마주잡고 눈물을 흘렸읍니다.』
이렇게 해서 국군지휘권의 교대는 감동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채 총장이 왜 이날 상오 중에 받은 해임통지를 정 장군에게 말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채 총장으로서는 아직 후임자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후배에게 먼저 이 문제를 입밖에 내기가 쑥스러웠을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미군 지휘소 찾아 작전협의>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취한 첫 조치에 대해 정일권 장군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우선 수원농대에 있는 미 전방지휘소로 「처치」 준장을 찾아서 적정에 관한 상세한 보고를 듣고 당면문제로서 미 공군의 지원강화와 국군의 재정비, 장비·탄약의 급속한 보충문제, 그리고 피난민의 질서유지 및 구호문제를 협의했읍니다.
이것이 7월 1일 상오중의 일인데, 그때 「처치」준장으로부터 미 지상군 투입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었지요. 가장 시급한 문제로서는 국군의 전열을 가다듬고, 장병의 사기를 드높여 주고, 곧 투입될 미군과의 긴밀한 합동작전체제를 확립하는 이 세 가지 문제에 역점을 두고 필요한 조치를 취했읍니다.』
한편 정일권 소장이 3군 총사령관이 되고서 취한 첫 인사로서는 6·25전에 도미준비로 대기시켰던 강문봉 대령을 작전국장으로 재임명했을 뿐이었다.
강 대령은 이런 임명이 있기 전에도 장창국 대령과 둘이서 사실상 작전국장 일을 봐왔었다. 이런 예는 인사국장 신상철 대령과 강영훈 대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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