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숙이네 만화가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어린이들이 레슬링 흉내를 내며 서로 목 죄기를 하다 목숨까지 잃었다는 「쇼킹」한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었다. 보고들은 것을 그대로 실연해 보고 싶은 모방성이 강한 어린이들에게는 어른들이 규제하지 않으면 안될 위험한 일이 수없이 많다.
학교 담을 맴돌아가다 보면 으레 눈에 띄게되는 것이 만화가게이다.
만화만큼 어린이들의 눈길을 이끄는 매혹적인 것도 드물다.
어린이들의 정서 순화를 위해 교사들이 온갖 신경을 쓰며 막으려해도 불량 만화들은 날로 늘어만 가고 있고 요즘에는 텔리비젼까지 갖추고 동심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학년초였다. 각 아동의 가정 방문이 시작되자 나는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숙이네 집부터 방문키로 하고 서너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하오의 햇볕을 받으며 교문을 나섰다. 선생님이 오신다는 그 기쁨에 깡충깡충 뛰며 걷는 숙이를 따라 들어선 집은 다름 아닌 만화가게였다.
침침한 구석 의자에 고개를 맞대고 만화를 보던 몇명의 아이들이 불시의 침입자를 힐끗 본 순간 읽던 책을 팽개치듯 일어서며 꾸벅 인사를 하고 뒷걸음질 쳐 달아난다. 그들이 사라진 뒤 얼마 동안을 난 불구인 숙이 아버지와 함께 얘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 가게는 잘 되세요?』『끼니 잇기도 어렵습니다.』 『잘되셔야할텐데….』 말끝을 잇지 못한 채 그대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데 뒤따라오던 춘이가 『선생님, 숙이네 만화가게 잘 안되나 봐요. 아마 TV가 없어서 일거예요. 선생님, 우리들이 보러 갈까요? 숙이네 돈 좀 벌게 말예요.』볼 우물지는 뺨에 가득 웃음을 머금고 나의 맘을 기다리는 춘이의 맑은 눈동자를 굽어보다가 『아차, 만화 보면 안되지』하며 나는 속으로 당황했다.
『만화가게에 들어가면 안돼요.』 조회시간마다 아이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면서 왜 숙이의 수그러지던 얼굴은 찾아 내지 못 했을까? 『끼니 잇기도 어렵습니다.』『잘되셔야할텐데….』 말끝을 이으려다 주춤한 나를 기억하며 「아이러니컬」한 현실에 쓴웃음 짓는 내 앞에 타고 가야만 할 버스가 와서 멎는다.
이영희 (인천 부평남 국민학교 교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