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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사람은 혁명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이응준 소설가

가을이다. 지하철 안 수많은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책은 고사하고 신문지 한 장 손에 쥐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나는 마치 우리가 영화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타고 있는 듯한 착각에 소름이 끼친다. 내 직업이 책을 팔아먹고 사는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책을 외면하는 세상이 아니라 책에 대해 잘 모르는 세상이 다만 무섭고 슬픈 것이다.

책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 물건이다. 책은 나무다. 푸르고 높은 아름드리나무로부터 책의 갈피 갈피가 나왔으니 책을 품고 있는 우리는 푸르고 높은 아름드리나무를 햇살처럼 들고 다니며 그 아래 고여있던 그늘과 그것을 흔들던 비와 바람을 읽고 있는 셈이다. 뜻 깊은 책 한 권을 갖는다는 것은 영원히 자라는 영혼의 한 그루 나무를 가진다는 뜻이다.

책은 반도체다. 책은 작가의 고결한 정신과 정교한 기술에 의해 써지고 유능한 편집자의 정성스러운 교정 끝에 의견이 보태진다. 적은 오자와 작은 착오에도 책은 사랑과 신뢰를 잃는다. 섬세한 책 한 권을 갖는다는 것은 최첨단 반도체를 바지 호주머니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넣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신기한 일이다.

책은 물이다. 낙타의 등 위에 올라 타 광활한 모래사막을 건널 때 우리는 책으로 외로움과 고달픔에 기갈 든 가슴을 적신다. 전원이 필요한 컴퓨터는 사막과 같은 오지에서는 지극히 불안한 존재다. 디지털은 나약하고 소심하다. 반면 아날로그는 지옥에서도 시를 쓸 수 있을 만큼 강하고 대범하다. 그뿐인가. 책은 베개다. 여행 중 읽다가 피곤하면 베고 잘 수도 있다. 요즘 잘나가는 영화의 액션 장면에서는 종종 두껍고 딱딱한 책을 무기로도 쓰더라.

계속 늘어놓자니 한이 없다. 경전이면 책은 진리가 되고, 성경이면 책은 신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만다라 같은 사물은 아마도 책 말고는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평범한 책 한 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소유한다는 뜻이 될 것이나 그마저도 책의 본령에 비한다면 결코 대단한 능력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지식과 지혜와 마음의 양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들 한다. 물론 맞는 말들이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우리는 외롭다는 말을 참 자주 한다. 심하게 외로우면 자살까지 한다. 왜 외로울까?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롭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이가 강자다. 책을 읽으면 혼자 있을 수 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책을 읽을 수 있다. 만원 지하철 속에 서서 책을 읽고 있는 자는 자신만의 절해고도에 홀로 서 있는 자다.

부처는 이렇게 가르쳤다.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 자귀의법귀의(自歸依法歸依),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책을 읽으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진리를 등불로 삼아 나 자신과 진리에게만 의지할 수 있다. 책은 외로움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준다. 책을 고르고 책을 펼치고 책장을 사각사각 넘기며 글자들을 차례차례 눈으로 보듬어나가는 그 행위 자체가 우리의 영혼에 안식을 준다.

책을 읽으면 내 옆에서 폭풍이 불든 말든 조용한 내면의 시간이 찾아오고, 그러한 시간은 우리의 상처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워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정신과 의사가 되어 나를 치료하는 일이고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리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과 같다. TV나 스마트폰으로 인간에게 흡수되는 모든 것들은 결코 쌍방향적인 수용과 반작용이 아니다. 그것들에 댓글이나 단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들에 참여하고 있는 게 절대 아니라는 소리다. 그것은 구린내 나는 환각일 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떤 거대한 힘과 정교한 시스템에 의해 조종 당하고 있다. 우리를 가두고 지배하는 그것은, 정치일 수도 있고 자본일 수도 있고 언론일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책장에서 책을 고르는 수도승을 장악할 수 있는 악(惡)의 제국은 없다.

그러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행위만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책이 내 인생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책 또한 마약과 다를 바 없다. 위로 받는 책을 읽고 위로 받나? 정말 그런가? 위로 받은 뒤엔 위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돼버리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책 읽기란 그 책을 읽고 지성으로든, 감성으로든 그 무엇으로든 스스로를 혁명하는 것까지를 뜻한다. 그렇지 않다면 독서조차 노예의 길이다. 때늦은 태풍이 온다고 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 혁명가다.



이응준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 『국가의 사생활』과 시집 『애인』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