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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책 읽는 인간] 석학 러셀의 질타 "어리석어라, 교조주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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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인기 없는 에세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함께읽는책
376쪽, 1만7000원

버트런드 러셀(1872~ 1970)이라는 이름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책장에서 처음 접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1927). 목사의 책장에 이런 불경한(?) 제목의 책이 꽂혀 있는 게 꽤 인상적이었다. 호기심에 들춰 보기는 했지만, 초등학생의 독해력으로 러셀의 책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대학에서 수강한 철학 강의를 통해 그 불경한 무신론자가 꽤 유명한 철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러셀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가령 어느 마을에 이발사가 단 한 명 있고, 그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나는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수염을 깎아준다.” 언뜻 보면 아무 문제없다. 하지만 이렇게 물어 보자.

 “그럼 이발사의 수염은 누가 깎는가?” 여기서 우리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가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발사)이 면도를 해야 하고, 스스로 면도를 한다면, 자신(이발사)이 면도를 하면 안 되니까.

버트런드 러셀 은 영국 총리를 두 차례나 지낸 존 러셀 경의 손자로 태어났다.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에 저항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매사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교조주의에 빠질 수 있다. 철학의 목적은 독단론의 오류를 경계하게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이 ‘역설’로 그는 칸토어의 집합론이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증명한다. 그는 그 해결책으로 ‘계형론’을 제시한다. 계형론은 이발사와 다른 사람들을 한 집합 안에 섞지 말고 각각 다른 계층에 위치시키자는 규약이다. 가령 그 유명한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해결하려면, ‘이 말은 거짓말이다.’ 속의 ‘이 말’은 저 자신이 아니라, 다른 문장들을 가리키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기술이론’에 관한 강의도 기억난다. “한국의 현 왕은 대머리다.” 이 문장은 참인가? 거짓인가? 현재 한국엔 왕이 없으므로, 이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니고, 그냥 무의미하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러셀에 따르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 그것은 “현재 한국의 왕인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대머리다”라는 문장의 축약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장의 형식과 그 뒤로 감춰진 논리적 형식은 전혀 다르다는 데서 ‘분석철학’의 발상이 탄생한다. 철학적 명제들을 분석하여 감추어진 논리적 형식을 드러내면, 언어의 오용에서 비롯되는 혼란을 바로잡고 명증한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러셀은 분석철학의 창시자가 된다. 그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적 문제는 문법적 오류에서 비롯된 사이비 문제이기에 ‘해결’될 것이 아니라 분석을 통해 ‘해소’돼야 한다고 말했다.

 기호논리학과 수리철학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이 철학자는 동시에 극성스러울 정도로 열성적인 반전운동가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는 비애국적 운동을 하던 그는 학교에서 쫓겨나 옥살이까지 한다. 히틀러가 한참 군비를 확장하는 동안에도 그는 무작정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뒤늦게 입장을 바꾸나, 이 때늦은 애국심을 그의 동포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반전주의자·반제국주의자로서 그는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적 주제에 관해 글을 쓰기도 했다. 해박한 지식, 날카로운 혜안, 교묘한 반어로 가득 찬 『인기 없는 에세이』(원제 Unpopular Essays·1950)는 에세이스트로서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이 책은 “우리의 비극적인 세기를 특징지었던 교조주의가 좌파에서도 우파에서도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좌우의 교조주의란 물론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가리킨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을 그린 캐리커처.

 여기서 그의 정치적 이상이 ‘자유민주주의’에 있음이 드러난다.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만이 진리라는 독단론에 빠져 있다. 그에 반해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마도 이 견해가 최선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민주주의를 옹호한다면, 그것은 이처럼 제한적이고 비독단적인 의미에서다.”

 하지만 그는 금방 제 말을 배신한다. “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철학, 정신적 기질 자체가 민주주의와 어울리는 철학은 경험론뿐이다.” 이 얼마나 독단적인가. 경험론에 뿌리를 둔 분석적 사유의 소유자에게 독일의 이상주의 철학은 정치적 교조주의의 잠재적 원천으로 보인 모양이다. 영미 철학에 대한 그의 천진한 믿음은 영미의 체제에 대한 소박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러셀은 오직 자유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이 중심이 된 세계정부만이 지구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1948년 그는 “소련이 핵을 갖지 못하도록 미국이 즉각 선전포고를 해서 협박해야 한다”고 망언을 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만이 평화롭다는 신념의 표현이겠지만, 전쟁을 전쟁으로 막는다는 발상이야말로 정말로 심각한 역설이 아닐까.

 신경을 거스르는 이 철학적-정치적 앵글로색슨주의만 빼면, 자유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철학적 소양과 윤리적 덕목의 교과서로서 손색이 없다. 극우파 아니면 주사파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는 60년 전 나온 책도 여전히 시의성을 지닌다. 가끔 등장하는 철학 얘기가 어렵다면, 그가 책에 그런 제목을 붙인 이유를 상기하라.

 “서평가들이 보기에 내 책에는 어려운 내용이 일부 들어 있는데, 저런 말로 독자들을 속여 책을 사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비난을 또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고백하건대 이 책에는 보기 드물게 멍청한 열 살배기 아이라면 좀 어렵게 느낄 만한 문장이 몇 군데 들어 있다. 이러한 까닭에 다음의 에세이들이 인기를 끌 만한 글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렇다면 ‘인기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밖에.”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 『생각의 지도』 『미학 오디세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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