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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외교는 선거기에 약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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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닉슨」행정부의 주한 미군 감축을 의한 한국과의 협의제의가 발표되자 학계와 미 민주당의 일각에서는 이것이 금년 11월에 있을 중간선거와 72년의 대통령선거에 대비하기 위한 「국내 문제의 국제 정치화」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나돌았다. 이러한 의견과는 달리 이번 조치는 미국 국가 이익의 선호가 반영된 것이라는 주장도 물론 있다. 미국 역사상 「선거전략이 외교 정책에 변질」을 강요한 것이라고 주장되었던 사례가 왕왕있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선거전략과 「국가이익」이 불투명하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 「케이스」를 논쟁자료를 토대로 들춰보면-.

<유권자 눈치봐 전쟁>
①미·「스페인」전쟁과 식민지 획득=전쟁이 일어난 것은 1898년4월, 다음 대통령선거를 1년7개월 앞둔 때였다. 「윌리엄·매킨리」대통령이 건국이래 미외교 정책의 대원칙이었던 독립·이상·도덕주의를 제쳐놓고 「전쟁을 통해 보호」한 것은 「쿠바」의 사탕수수, 바꿔 말하면 「유권자들의 호주머니」였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과의 강화조약에서는 「쿠바」외에 「필리핀」과 「괌」도를 미 식민지로 손에 넣게됐다.
국내의 「양심적 지성인들」이 유명한 「제1차 대논쟁」을 통해 맹렬히 반대했다. 「매킨리」는 국가이익을 내세워 다수의 유권자가 원하는대로 밀고 나가, 그의 재선에는 지렛대 구실을 했다.

<윌슨 재선되자 참전>
②1차대전의 참전지연=「윌슨」대통령이 대독선언을 한 것은 전쟁이 터진지 3년뒤. 재선 l년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연과 참전의 「명분」뒤에 숨어있는 실질적인 이유는 「국민들의 의사」 즉 유권자에 대한 「눈치」였던 것.
왜냐하면 「윌슨」이 『전쟁을 하더라도 지켜야한다』고 지적한 해양자유 및 인도주의는 선전포고 2년전부터 깨어져있었기 때문. 즉 선거를 1년여 앞둔 15년2월에 독일이 무경고 격침작전을 발표했을 때는 무려 7개월씩이나 기다린 끝에 협상에 성공, 「윌슨」재선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재선 이듬해에 독일이 이 작전을 재개하자 지체없이 선전포고를 했다. 결국 「윌슨」의 참전 결정을 늦춘 것은 명분이 늦게 발견된 것이라기보다 참전후의 대통령선거에 임하는 것을 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주만 피습 후 개전>
③2차대전의 참전지연=「루스벨트」대통령이 미국을 「연합국의 병기공장」으로 제공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대전이 터진지 3년뒤인 40년12월. 이것은 「공교롭게도」 자신이 3선된지 한달이 채 못된 때였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참전명분이 물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있었다지만 개전 3년만에야 행동으로 연결된 과정은 「윌슨」의 1차대전 참전지연과 거의 비슷했다. 즉 『이성이 무엇을 시키는가』하는 것보다 『유권자의 표가 어느쪽을 향하는가』가 현실정치의 불기둥이었던 것이다.

<4년 안에 중국 적화>
④중국대륙의 상실=일본의 무조건 항복 뒤 국공합작이 깨지고 중국대륙이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가기까지는 불과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기간 「트루먼」행정부가 한 일은 「너무 뒤늦게」무기를 보내준 것과 이 엄청난 손실을 「중국의 국내문제」로 규정한 정도.
이런 과오를 범하게 한 것은 2차대전에 시달렸던 미국인들의 염전경향과 이 「대중의 감정」을 눈치보기에 바빴던 선거전략이었다. 「트루먼」대통령은 다음 선거를 불과 6개월 앞둔 52년3월29일 재선출마를 포기했다.

<38선 북진 한때 자제>
⑤한국전의 「미완」 휴전=7·27휴전조약이 「아이젠하워」대통령의 선거공약이행을 위해 강행되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러나 전임자 「트루먼」 역시 일부국민의 조기종전희망에 쫓기 위해 자제를 거듭했다. 38선 이북진격에 대한 우유부단, 「맥아더」장군의 만주폭격 주장 묵살과 「해임」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지금 한국문제는 또다시 선거전략의 테두리 속에서 취급되고 있을 것인가? 「닉슨」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72년11월 이전까지 전주월미군을 철수할 생각』이라는 「마이크·맨스필드」의원의 전언은 국내 정치, 즉 선거전략이 외교정책에 던지는 어두운 그림자가 아닌지 의심스럽다.<홍사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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