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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문화 심포지엄 (7)|도의의 현대적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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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사회 생활 잇는 절차>
오늘날 한국·중국·일본 등 동양 3국에서 널리 쓰여지고 있는 예절이란 용어에 대한 이미지에 있어서 3국 인간에 약간의 감각적 차이가 있을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본원적으로는 한문의 고장인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이미 아는 바와 같다. 그렇다면 이 용어의 본고장인 중국인이 이 말에 어떠한 뜻을 담았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대 중국의 서적 중 예절을 전문적으로 다룬 것에 『예기』라는 책이 있고 그 가운데 흩어져 있는 예의 개념의 조각 조각을 종합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예절이라는 것은 인문의 행동 준칙이니 자신을 수양하고, 남과 사귀고, 세상과 접촉하고, 신령을 제사 지내는 등 생활을 이어나가는데 필요한 절차다.
그것은 인간의 정리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상대에 대한 존경이 내포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만 의미 없는 관습적인 행동이 아니라, 대외적인 자세를 올바르게 갖춤으로써 자신의 내심을 바로잡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 등이다.

<시대와 환경의 소산>
물론, 이러한 의미 외에도 유교 철학적인 어려운 설명이 덧붙여져 있으며 이러한 예법의 기원이 주례에 있고 주례는 곧 주나라의 모든 제도의 창설자인 주공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등 중국적인 성인 숭배 사상에 근거를 둔 기록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인간 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제도나 예법을 어떤 성인이 일시에 모두 만들었다는 것은 반드시 사리에 맞는 설명이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는 사회 생활에 필요한 제도나 예법, 크게 말해서 문화라는 것은 인간이 사는 시대와 환경의 요청에 따라서 많은 사람의 협력에 의해서 서서히 발전되고 정비되는 것이며, 결코 일시에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월남 등에서도 농담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체로 중국형 예절의 변종이 근자에까지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도 필경은 이들 3국이 중국 문화 내지 유교 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었고, 그 사회 구조도 대체로 동양적 봉건 질서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전통적 예절은 동양적·유교적 사회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예절의 무정부 상태>
『오늘날의 한국에는 예절이 없다.』『가정이나 학교에 출입할 때도 부모나 선생에게 인사조차 안 하는 청소년이 많다. 』『「버스」간에서도 노인이나 아녀자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광경이 점차 우세하여져 가고 있다』『기차를 탈 때나, 물 배급을 받을 때도 차례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공중 도덕을 문란케 하는 돌 놀이의 유행은 딱 질색이다』 등등의 불평을 우리는 항 다반사로 듣고 또 본다.
위와 같은 불평 중에서 『오늘날의 한국에는 예절이 없다』 라는 말은 물론 과장된 표현이라 할 것이나, 종래의 예절 체계가 점차 무너지고 있다는 인상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인상은 반드시 동방예의지국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질서 있고 조화된 사회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불쾌와 불안을 안겨 주는 사례임에는 틀림없다.

<전통 사회 붕괴 가속화>
앞서도 말했거니와 예절은 시대와 환경의 서산이었다. 오늘날의 한국의 예절이 붕괴와 혼란의 과정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결국 이것도 오늘날 한국이 처해 있는 시대와 사회가 구 전통이 무너지면서 아직도 새 전통이 확립되지 못한 혼란과 교대의 과도기에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된다. 사실 한국의 전통 사회는 가속도적으로 무너지고 있으며, 새로운 근대적 질서는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오늘이다.
서양의 역사에서 자라난 민주주의 사상이 이 나라의 정신적 풍토에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 제도와 형성만이 무작정 모방되어 내용과 형식 사이에 요란스러운 알력을 일으키고 있는 이 판국에 정연한 예절이 꽃피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리일는지 모른다.
이렇게 오늘날의 예절이 그 권위를 잃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거시적으로 볼 때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 세계적 현상이어서 미국에서도 「빅토리아」시대의 교양을 이어받은 세대들은 버릇없는 청소년의 수가 격증하는 추세를 우려하고 있으며, 이와 비슷한 통탄의 소리는 일본·중국·유럽 등에서도 이구동성으로 일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이로써 예절의 쇠퇴가 유독 한국만의 고민이 아니며, 한국의 경우는 다만 시대적 전환의 질과 양이 더욱 심각하여 예절의 일종의 무정부 상태를 자아내고 있을 뿐인 것을 알 수 있으므로 한국인이 예절을 모르는 민족이거나 예절을 지킬 능력이 부족한 민족으로까지 자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러한 판국에는, 즉 구 도덕은 권위를 잃고 근대적 사고 방식이나 민주주의적 모럴은 아직 생리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그 관념만이 유희되고 있는, 이러한 판국에서는 자칫 예절이란 없어도 좋은 유한 계급의 사치 정도로 오해되기 일쑤다.
수신·도덕·예절 등의 이미지가 일종 따분하고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구속감으로 떠올라서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요즘의 풍조는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평등의 표어는 버스간에서 노인이나 아녀자에 자리를 내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 부모나 선생에게 먼저 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끌며 자유주의라는 것은 남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아도 좋은, 멋대로 하는 주의로 이해된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다수결의 형식으로만 파악되어 그 과정이 경시되기 때문에 다수로 보이기 위하여, 또한 그것을 방해하기 위하여는 온갖 비민주적인 방법을 동원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속셈하는 주의가 되고 만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예절은 그것이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귀찮은 것으로 보이더라도 그것은 생겨날 만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서 생겨난 것이며, 결코 어떤 학자나 유한인 즉흥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우스꽝스럽게만 보인다면 그것은 시대가 변천하여 그것이 만들어졌던 당시에 가졌던 절실한 의미가 희박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인간 관계서의 행동 규범>
모든 제도나 법규는 일단 만들어지면 그대로 고정되어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사회 생활과 보조를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렇게 되기 마련이며 우리의 전통적 예절도 우리의 격변하는 현실에 전면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생각하면 예법이란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 관계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약속된 행동 규범이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원칙이며, 법에 의하여 강요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생활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는 법과 더불어 필요하다. 말하자면 사회 생활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며 그것이 없으면 인간 관계는 마찰을 일으켜 사회 생활은 파괴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구속을 느끼기 때문에 예법을 지키기 싫다는 말은 곧 사회 생활을 하기 싫다는 말과 같이 무책임한 것이다. 한마디로 잘라서 예절은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문화인으로서 살아 나가는데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행동 준칙이다.

<구 예법의 맹종도 잘못>
예절이 사회 생활에서 불가결의 것이라면, 한국의 오늘날의 예절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바야흐로 근대화를 향하여 몸부림치고 있는 이 마당의 예절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블랙 교사의 말과 같이 근대화 작업에는 모델이 따로 없고 각국마다 각자의 역사적 풍토에서 근대문화를 점착시킬만한 토양을 선택해서 이를 배양하는 독자적인 방법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전통적인 예법 속에서도 우선 시대 착오적인 것과 여전히 존재 이유를 가진 것을 가려서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육성해야 할 것이다.
다음엔 또한 관혼상제의 상부상조하는 풍습이다. 이는 오늘날 그 허식과 낭비가 반성되어 가정의례준칙이 나와 있는 바이지만 그러한 폐습은 본래의 정신이 타락된 결과일 뿐이므로 모처럼의 반성이 적절히 실행만 되면 우리의 미풍으로 살려나갈 수 있는 것에 속한다. 그밖에도 우리의 전통 중에서 남길 수 있는 것은 또 없지 않은 것이다.
생각하면 모든 시대의 예절과 같이 근대인의 예절도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히는 것이 상책이다. 바꾸어 말하면 가정 교육이 기본이 되어야하며, 학교 교육·사회 교육이 이에 따라야한다. 가정 교육에는 부모, 특히 아동과 빈번히 접촉하는 주부가 주도가 되어야하며, 학교에서는 교사가, 사회에서는 매스컴이 지도적 역할을 하여야한다. 교사의 잡부금 독촉과 매스컴의 상업주의가 역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엄격히 반성한 후에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계적으로 예절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으로 하여금 도의는 엄연히 살아 있고 예절은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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