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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지하철 안전실태] 驛舍·객차 방재법규 제각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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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각각인 소방 법규, 이원화된 운행 관리방식, 형식적인 재난 훈련-.

지하철이 안전 무방비로 내몰리는 것은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뿐 아니라 허술한 지하철 관련 법령이나 엉성한 운행 관리체계 등 열악한 소프트웨어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하나의 노선을 놓고 운행 통제 기관이 2~3개로 나뉘는 데다 신호체계.사용전력.통행방식이 제각각이다. 게다가 방재(防災)교육은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설마'하는 안전 불감증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한 지붕 세 살림' 소방 규정=우리 지하철 소방 법규는 효율적인 관리를 어렵게 한다. 역사(驛舍)는 소방법, 객차는 건설교통부령, 역사 내 배연설비와 방화구획은 건축법의 규제를 받는다.

이 때문에 소방 당국은 객차 소방시설에 대한 점검이나 지도 단속을 하지 못한다.

지하 공간 화재가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유독가스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가스와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자동 방화셔터 등 방화구획은 건축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 건축 관련 부서의 몫이다. 소방규정으로 일원화하자는 논의가 몇년째 계속됐지만 건교부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처럼 소방 법규와 책임 기관이 체계적이지 못할 뿐더러 아예 기준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역과 역 사이 지하터널이 대표적인 사례다. 소방법 시행령이 지하터널 중 '궤도 차량용'을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조문의 사각지대인 만큼 서울지하철 터널에 자동소화설비가 설치된 곳은 한 곳도 없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니 지하철 역사를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방재 설계 기준도 낙제점이다. 미국과 홍콩에선 피난 허용시간과 피난시 계단 운용 등에 대해 기준을 정해놨다.

미국 국가화재예방협회(NFPA)는 '화재나 지진 등 사고가 났을 때 승객들이 승강장에서 4분 이내에 안전한 장소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또 홍콩에선 '승강장에서 출구까지 4분30초 내에 대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정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기준이 없다.

서울 군자역의 경우 지하 승강장에서 지상까지 대피시간이 무려 8분15초나 걸린다.

인천지하철 시청역의 경우 2호선(계획)과 환승이 가능하도록 설계돼 깊이가 26m에 달한다. 지상까지 나가기 위해선 2백여 계단을 숨가쁘게 올라가야 한다.

이 밖에 역사 내 스프링클러 설치를 둘러싼 규정도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서울시내 지하철 어떤 역사의 승강장에도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다. 소화전이 유일한 소방시설이다. 하지만 대합실엔 스프링클러가 있다.

경민대 소방과학과 김엽래 교수는 "방재실이나 사령실에서 폐쇄회로를 통해 관찰하다 화재가 나면 고압전류를 수동으로 차단한 뒤 스프링클러를 가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노선에 서로 다른 관리방식=짧게는 2~3초, 길면 30초까지 계속되는 어둠-.

서울지하철 1호선이 서울역~남영역 구간을 통과할 땐 객차 내 전등이 꺼진다. 이용객이 '그러려니'하고 지나치는 이런 정전사태는 수도권 지하철과 전철의 2원화된 운행방식 때문이다. 서울지하철 구역과 철도청 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하철공사 관할구역에선 직류 1천5백V, 철도청 구역에선 교류 2만5천V를 사용한다.

전동차가 직.교류 전환을 위해 전원을 끄고 무동력 상태로 운행하는 이른바 '사(死)구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지하철 1호선의 청량리역~회기역 구간과 4호선 남태령역~선바위역 구간도 마찬가지로 사구간이다. 서울지하철공사 관계자는 "전동차 전원을 끈 채 얼떨결에 다음역까지 2㎞ 정도 구간을 무동력 상태로 운행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운행 주체와 방식이 다르다 보니 통행 방향을 맞추기 위해 X자로 꼬인 단선터널(상.하행선 별도 터널)도 만들어졌다. 4호선 과천선 구간 중 서울지하철공사가 관할하는 당고개에서 선바위까지는 전동차가 오른쪽 레일로 달리지만 철도청 관할구역인 서울 시계부터는 지하 선로가 꼬이면서 안산까지 왼쪽 레일로 운행된다.

전동차의 기종과 신호체계도 제각각이다. 4호선 당고개에서 금정 구간은 기관사가 전동차 안에서 자동적으로 신호를 볼 수 있는 ATC 방식이지만 이후 안산까지는 기관사가 선로변 신호 등을 육안으로 확인해야 하는 ATS 방식이다. 기관사들은 "안개가 자주 끼는 안산 부근에서는 신호등 보기가 쉽지 않아 오히려 ATC 방식이 낫다"고 주장한다.

◇형식적인 소방 훈련=서울 지하철공사의 소방 훈련은 '전파 훈련'으로 불린다. 훈련을 받은 직원이 불참자에게 훈련 내용을 전달해준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공사는 매년 한두 차례 소방훈련을 실시한다. 역사 규모에 따라 큰 곳은 두 차례, 작은 곳은 한 차례 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지난해 지하철공사 소방 훈련에 참가한 사람은 1회 평균 23명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지하철공사 한 직원은 "소방훈련이라는 게 몇몇 시범자가 시범을 보이면 나머지는 구경하는 식인데 굳이 참가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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