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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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강교의 폭파>②
최창식대령이 사형을 받은 첫 군법회의의 모습을 좀 더 다루어보기로 하겠다. 원태섭재판장과 피고와의 문답 내용은 본연재 34회에 소개한 대로다.
다음은 최창식공병감으로부터 폭파명령을 받고, 현장에서 폭파집행을 지휘감독한 공병학교장 엄홍섭중령(예비역육군중장·현진양건설부사장)이 법정에서 진술한 증언내용을 기록에 있는대로 대충 소개하겠다.
▲재판장=적의 전차가 보이지 않고, 아군의 차량이 계속 도강하고 있는데 어째서 폭파했는가?

<점화하고 공병학교장 오인>
▲엄증인=최공병감이 발을 구르며 폭파를 독촉했다. 점화를 명령한다음, 본인은 울었다.
▲재판장=왜 울었는가?
▲엄증인=이제 이 한강다리는 우리 손으로 다시 복구할 수도 없겠고 한강 북안에 남아있는 잔류부대와 피난하지 못한 시민들을 생각하고 울었다.
▲재판장=그 당시의 형편으로는 자동차를 전부 도강시키고 끊었어도 괜찮지 않았겠는가?
▲엄증인=그렇다. 자동차가 계속 뒤따라오고, 적전차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기다렸다가 끊었어도 무방했을 줄로 안다. 하나 최대령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폭파했다.
▲재판장=교량폭파 당시 아군차량을 보았는가?
▲엄증인=남한강 파출소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못 보았다.

<최공병감에 불리한 증언>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엄홍섭중령의 증언은 피고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것이었다. 조기폭파에 못을 박은 것이다.
최창식대령은 군법회의에서 자기가 작전상의 책임을 지고, 적정을 파악할 의무는 없었다고 끝까지 항변했으나, 결국은 절단공사에만 급급한 나머지 아군의 안전을 위태롭게하고 무수한 차량과 장비를 적에 노획내지는 파손케했으므로 그 죄가 적전비행에 해당한다고 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9월21일에 최대령에 대한 사형판결은 판결심의회에서 정당하다고 그대로 확정됐으며 이날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참고로 최창식대령 군법회의 판결문 일부를 소개하면…
『판결=피고인은 사형에 처함.
죄과=적전비행죄(국방경비법제27조)에 대하여,
피고인 육군대령 최창식은 일본육사공병과를 졸업하고 일본군대에 복무하다가 해방후 귀국하여 단기 4281년(서기1948년) 12월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공병단장의 직에 취임이래 누진하여… (중략) 금반 6·25 북한공산군 불법남침으로 인하여 수도 서울의 사수가 불가능하게 되자 6월27일 육본참모회의에서는 괴뢰군 전차가 서울시내에 침입하면 한강교 및 인도교를 폭발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소장은 공병감인 피고인에게 핵공사를 실시할 것을 명하였던 바 피고인 최창식은 당시 공병학교장 육군중령 엄홍섭에게 폭발준비공사를 명령하여 금일 15시30분경 해공사를 완료하고 대기중 6월28일 오전 2시경 아군전 전선이 후퇴하게되자 용산 육본에서 참모총장으로부터 교량폭파에 대한 전화명령을 수함을 계기로 하여 적정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임교하는 아군부대로 인한 고려를 전연 도외시하고 동일 오전 2시30분경 한강교 3개소를 폭파하고 10분후에 재차 인도교를 폭파하여 막대한 차량과 병원은 교량절단 간격으로 추락하고 무수의 차량장비 및 군수물자는 적에 노획당하고 수만 병원은 도강 미완료로 인하여 일대 혼란을 야기하였음.

<상황판단은 공병감 책임>
전시 범죄사실은 심안컨대 설령 교량절단 명령이 유하였다하더라도 적정을 확인하고 아군부대가 완전히 도교한 연후에 절단공사를 실시함은 기술참모인 공병감의 책무이며, 피고인 최창식은 부하공병을 지휘하여 아군의 도하상황을 확인한 연후 절단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절단공사 자체에만 급급하여 계속하여 임교하는 아군부대를 인식하면서 교량절단을 실시함으로 인하여 전시와 여한 결과를 초래했음은 국방경비법 제27조 적전에서 비행, 우는 태만으로 인하여 부대의 안전을 위태롭게하는 행위에 해당하여 동조를 적용하며 주문과 여히 판결함.』
요는 한강교의 조기폭파와 이에 따른 참화의 모든 책임이 공병감 최창식대령에게 있다는 판결이었다.
이 재판이 공정했는가의 여부는 1962년부터 64년까지 걸린 재심에서 무죄로 판정되어 스스로 입증되었는데, 당시 그 군재의 법무사였던 고원증 육군중령(현변호사개업·49)도 사실심리가 소홀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서울시민에 영합한 재판>
『재판이 다분히 서울시민의 감정에 영합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심리가 소홀하게 된 점도 있다고 봅니다. 당시 국방장관이 재판을 빨리 끝내라고 호통을 치던 생각이 나는군요. 지금 군재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당시야 전시이고, 더욱 국방경비법에 의해 군재가 구성된 것이니, 공정한 재판을 기하기가 힘들었지요. 단심제였으니깐요.
그리고 최창식대령의 법정태도는 대단히 떳떳했던 것으로 기억돼요.』
고원증씨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 군재가 빗발치는 국민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 재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공병감 최창식대령과 그 다음 지휘관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대령이 주장한대로 작전상의 재량은 없고 다만 기술적 책임뿐이라는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하더라도 그 기술상의 임무를 완수못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즉 끊어야 할 철교 셋과 인도교 하나 중 중간 단선철교 하나는 폭파치 못했다.
28일에 허필은대위의 작업조가 한강 남쪽에서 다시 폭파하려고 했으나, 북안에서의 적포화로 작업이 여의치않아 제일 아치교상에 폭약을 장전, 점화했지만 덜 부서졌다. 그후 B-29가 여기를 수차 폭격했으나 폭파에 실패했다.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도>
북괴군은 이 철교를 재빨리 수리하고 탱크를 도하시켰다.
한편 작전상의 재량권 문제에 있어서도 현지에 있던 최대령이 마땅히 행사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돌려 한강교를 폭파할 때까지의 자초지종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한강다리를 끊자는 이야기는 이미 26일 저녁부터 나왔다. 당시 공보처장이었던 이철원씨는 『26일의 각료 간담회에서 어느 장관이 다리를 끊어야한다고 제의했다』고 말하고 있다.

<공병사관후보생들이 폭파>
참모학교장이었던 김홍일씨는 『한강교 폭파문제는 처음에 국방부에서 다루다가 그후 27일 정부가 수원으로 옮아가고 시흥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온 육본에서 책임지게 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을 보면 한강교 폭파는 처음부터 육본지휘부에서 다루었다고 돼있다.
즉 채병덕참모총장은 25일저녁 북괴군이 의정부를 점령하고 국군이 창동선으로 후퇴했을 때, 공병감 최창식대령을 총장실로 불러 한강교 폭파를 미리 준비해두라고 지시했다. 이때 채총장은 최대령에게 임진강교 폭파실태를 상기시키면서 한강교는 자신이 있는가 라고 다그쳐 물었던 바 이번에는 기술적으로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공병감실로 돌아온 최대령은 폭파교관 황원회중위를 불러 폭파문제를 상의했는데 황중위도 자신이 있다는 대답이었다. 황중위는 폭파교관으로서 공병사관후보생을 데리고 한강 인도교에 나와서 현지 폭파실습을 했기때문에 기술적으로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다시 현장에 나가서 복선철교 1개소, 단선 철교 2개소와 인도교에 대한 폭파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때 김포에 있던 공병학교는 한남동쪽의 남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있는 공병부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26일 저녁의 한강교 폭파를 에워싼 전후 상황이었다.
▲정정=본연재 제4회 본문 6·25 당시의 각료 명단중 사회=허정은 이윤영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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