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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강교 조기폭파의 책임자는?
1916년 한강에 처음으로 세워진 한강인도교 (지금의 한강대교)는 지금까지 2차례에 걸쳐 다리가 무너지는 비운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중 하나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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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집] 풀리지 않는 전쟁 4대 의혹
6.25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다 되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혹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은 다음 네가지. 1. '애치슨 라인' , 의도된 복선 있었나 = 애치슨 라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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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2)-제79화 육사졸업생들(185)|9기생 장성
9기생 가운데 가장 먼저 별을 단사람은 5·16에 주체로 참여했다가 63년 민정이양과 함께 애편한 강상욱 (56·함남원산·최고의원) 김원희 (54·황해해주·국방부관리국기획과장)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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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육사졸업생들(115)-「7후」의 활동
6·25때 한강인도교를 너무 일찍끊어 피해가 막대했고 말썽도 컸지만 큰다리를 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군사적으로도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지만 당시로는 기술적으로도 결코 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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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5)유사졸업생들-「5·16」후의 5기생
5·16군사혁명에 무력부대를 출동시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실질적 주역인 5기생들은 혁명성공 후 다수가 혁명정부 요직에 참여했다. 군사정부의 최고의결기구였던「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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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1) 제79화 육사졸업생들(74) 5기생
육사5기는 47년 7월l일 입교해 만9개월의 교육을 받고 48년4월6일 3백80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9개월의 교육기간은 4년제 이전 사관학교에서는 생도1기로 불리는 10기의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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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8)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51) 장창국
46년1월 각도에 1개 연대씩(처음엔 1개중대편성) 8개연대로 출발한 경비대는 49년6월까지 8개사단으로 발전했다. 볼과 3년5개윌동안 병력면에서 거의 20배의 성장을 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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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지원작전(9)|공병(3)
공병의 보병전투는 50년7월 하순부터 9월초 사이의 낙동강 방어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특히 제1201 건 공단과 제8사단 공병대대는 구산동 전투와 영천작전을 통해 전사에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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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25 20주 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6)
한강다리는 처음에는 27일하오 4시쯤에 끊을 계획이었다. 이날 하오께에 창동저지선이 무너지자 육본지휘부는 참모회의를 거쳐 시흥으로 후퇴를 결정, 하오 1시께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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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5)
② 최창식대령이 사형을 받은 첫 군법회의의 모습을 좀 더 다루어보기로 하겠다. 원태섭재판장과 피고와의 문답 내용은 본연재 34회에 소개한 대로다. 다음은 최창식공병감으로부터 폭파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