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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육사졸업생들(115)-「7후」의 활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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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25때 한강인도교를 너무 일찍끊어 피해가 막대했고 말썽도 컸지만 큰다리를 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군사적으로도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지만 당시로는 기술적으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서울철수가 불가피하게되자 6월26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폭파를 준비토록 명령했다.
최대령은 주변에 적임자가 없어 공병학교에서 폭파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7기후반 출신의 황원회중위를 육본으로 불렀다. 당시로서는 그가 한강다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전문가였다고 한다.
채병덕 총장은 한강교를 폭파할 자신이 있는지를 물었다. 황중위는 기술적으로 자신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병학교 교관으로 있으면서 공병사관후보생들을 데리고 한강교에 나가 폭약계산·화약장치방법·점화장소선정등에 관한 현장훈련을 한바있었다.
채병덕 장군은 6월5일 공병이 임진강철교폭파에 실패해 북괴군이 서울진격이 빨랐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한강폭파만은 실패하지 말아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같다.
폭파명령은 채총장-최창식공병장-엄홍섭공병학교장-황원회중위라는 계통을 통해 하달됐다.
그러나 그때 각종차량이 계속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황중위는 북한강파출소와 중지도에 나가있는 공병경계분대에 대해 차량통과를 차단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래도 차들이 계속 건너오자 황중위는 북한강파출소방향에 대고 위험사격으로 카빈총을 쏘았다. 겨우 차량의 대열이 저지되자 이번엔 이시형 부통령의 차가 저지선을 뚫고 건너오고 있었다. 그뒤로 다시 10여대가 통과한 후 차량통행은 차단됐다.
황중위는 점화신호를 보내고 자신이 직접 한강인도교 폭파퓨즈에 점화했다. 다른 철교 3개에 대한 점화는 황인덕 중위가 맡았다.
28일 새벽 2시반쯤 드디어 거대한 폭음과 함께 4개의 한강다리 가운데 3개가 완전히 끊어졌다. 중간에 있는 단선철교 하나가 폭파되지 않아 그후 B29가 수차례 폭격을 했지만 성공치못했다. 괴뢰군은 이 철교를 수리하여 일부 전차를 도하시켰다고 한다.
나중에 한강인도교 조기폭파가 문제되어 최창식대령이 군재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집행됐지만 황중위는 상부의 명령에 따른 폭파였기 때문에 문제되지는 않았다. 5·16후에는 최대령의 폭파명령도 상사의 명령에 복종한 정당한 행위임이 밝혀져 무죄가 됐다.(한강폭파문제는 후에 상술코자 한다) .
대령으로 예편한 7후 한근호씨(57)는 53년 반공포로석방때 광주포로수용소 경비대장(당시 중령)으로 있으면서 l만여명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한중령은 광주지구의 포로석방연락책을 맡은 임기택중령·광주지구 헌병대장 이윤형중령과 협의하여 6월18일 새벽2시 수용소의 외등을 깨는 총성을 신호로 경비요원들이 미리 끊어놓은 철조망으로 반공포로등을 탈출시켰던 것이다.
이에앞서 한중령은 전날밤에 A·B·C 3개의 수용캠프에 밀사를 보내 반공포로 간부들에게 탈출계획을 알려 놓았었다.
광주에서는 총 l만6백여명중 l만4백여명이 탈출했는데 그것은 대성공이라 할만했다.
7후 이종익대령(57)은 육군군악대의 창설자이기도하다. 북진때 그는 신카나리아·백설희등 우리나라 인기연예인들을 이끌고 평양시공회당에서 l주일간 공연을 벌여 압박에서 해방되고 전쟁에 시달린 북한동포들을 위문했다.
7후의 이만복장군이 공병감으로 있을 때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중앙청을 철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장군은 대구에 출장중인 이종찬 총장을 상경케하여 중앙청을 철거하려면 20만대분의 물량을 버려야하는데 전시에 그런 장비와 병력을 동원할 수 없으니 이박사를 번의케하는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총장은 경무대로 가서 1백만대분을 버려야한다고 말해 이박사를 번의시켰다고한다.
이박사는 56년10월4일 이형근 참모총장을 불러 같은 명령을 내렸었다.『중앙청은 일본이 식민통치를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야. 위에서 보면 그 건물은 날일자형이라구. 공병을 시켜 없애버리도록!』
이장군은『그렇게 따지면 이 경무대도 총독관저였으니 철저해야 됩니다. 예산이 많이 들고 폭파과정에 인근주민에게 피해가 많으니 중앙청을 다른 목적으로 쓰는 것이 어떻겠읍니까』고 했다.
이대통령은 안면경련을 일으키며『참모총장은 대통령의 말에 복종해야돼. 기술자들은 가능하다는데 제네랄 이는 왜 안된다는거야!』하며 노기를 띠었다고 한다.
이장군은 참모들과 의논해 보겠다고 말한 후 육본에 돌아와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엄홍섭 공병감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므로 명령만 내리면 철거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재흥 참모차장등 대부분의 참모들이 철거에 반대했다. 이총장은 다시 경무대로 가서 번의를 요구하여 이박사의 중앙청철거의지는 또다시 좌절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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