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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1) 제79화 육사졸업생들(74) 5기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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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육사5기는 47년 7월l일 입교해 만9개월의 교육을 받고 48년4월6일 3백80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9개월의 교육기간은 4년제 이전 사관학교에서는 생도1기로 불리는 10기의 1년을 빼고는 가장 긴 교육기간이었다.
그외에도 5기는 여러면에서 특색을 지닌다.
우선 군 출신 아닌 민간인만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모집을 한 첫기였다. 이 때문에 입교생들은 어느기보다 나이·학력·출신성분이 비슷한 동질성을 갖게 됐다. 교육기간이 늘어나는것과 함께 교육내용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어 사관교육의 틀이 잡힌 것은 5기부터라고도 할 수 있다.
선발에서도 4기까지의 간이 시험대신 국어·국사·수학·영어·작문의 필기고사를 제대로치렀다. 지구별 모집에서 서울의 경우 15대 1의 높은 경쟁이었다. 특히 이북출신 월남자들이 많아 3분의 2를 차지했다.
선발된 후보생들은 제l, 3, 5연대에 1백20∼l백60명씩 분산배치돼, 처음 석달동안 기본교육을 받았는데 고된 훈련을 못견뎌 상당수가 탈락했다. 신병교육이 끝난후 태능사관학교에 정식입교할때는 중도탈락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현역 하사관과 사병가운데서 일부를 선발, 충원해 4백20여명이 교육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중 다시 40여명이 탈락하고 3백80명이 졸업, 임관한 것이다. 그만큼 엄격했던 교육이었다.
중학(5년제)졸업이상 고른 학력에다 충실한 교육으로 5기생들은 어느 기보다 실력이 있다는 평가와 아낌을 받았다.
이들이 임관한 후 보병·포병·기갑·통신·공병등 각종 병과가 창설돼 5기생들은 각 병과의 창설기간요원으로 갈 수 있었다.
공군참모총장을 나란히 지낸 박원석(충남대덕·공군중장·전한-이석유회장·유공사장)장지량(전남나주·공군중장·전주이디오피아·필리핀대사·10대국회의원)장군은 육군항공대창설요원으로 갔다가 공군이 독립하면서 공군이 돼 정상에 까지 오른 육사 5기생이다.
두 분은 또 모두 일본육사 출신으로 박장군은 나보다 한기 위인 58기, 장장군은 한기 아래인 60기였다.
5기생 임관자 3백80명가운데 장성에 진급한 사람은 두 분을 포함, 모두 58명(추서 1명포함)이다.
그중 대장은 10·26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장군(경북금능).
중장은 앞서 말한 공군의 박·장장군외에 주월사령관·2군사령관·주브라질대사등을 역임한 채명신장군과 12·12때 1군사령관으로 있다가 지난해 2월 별세한 김학원장군(평북강계)등 4명이다.
소장은 24명이나 된다.
▲강완채(정주·사단장·주월사작전부사령관·대우정밀사장) ▲김익권(광주·사단장·육대총장) ▲김재춘(김포·육군방첩부대장·전중앙정보부장·국회의원) ▲김영찬 김필호 ▲박춘식(함경도·12사단장·군단장·교통장관) ▲나희필 ▲방경원 ▲배덕진(황해신천·육군통신학교장·체신장관·방직협회장) ▲백남태 ▲양인석 ▲양원섭 ▲유창훈(평북·주월백마사단장) ▲유갑렬 ▲이원엽(함남함흥·육군항공학교장·심계원장·감사원장·남해화학사장·7대의원) ▲이룡(함북경성·사단장·보병학교장·육본 기획통제실장·강원지사·교통차관·철도청장·인천제철사장) ▲정규한 ▲정세진(경기용인·33사단장·보병학교장·2관구사령관·종근당사장) ▲최대명(평북강계·주월사작전부사령관·국방대학원장) ▲최철(함경도·감찰감·한양컨트리사장) ▲최택원(평북신의주·사단장·5관구사령관·육본작전참모부장·감사위원·총무처장관) ▲홍창표(함경도·사단장·호남정유이사) ▲황종갑 ▲김용관장군등이다.
준장으로는 ▲김경옥(협진식품회장) ▲마웅호(개성·녹십자회장) ▲박기석(평양·공병학교장·건설장관·도로공사사강) ▲박창원(함북부영·33사단장·경기지사·해외개발공사사장·유신고속사장·유신고이사장) ▲송찬호(평양·고사포여단장·주브라질·스위스대사)장군등과 김명환 박형석 손영을 신건선 어태우 유룡균 이광선 이승우 이정순 장경석 장태명 전경진 정극서 최내현 하태영 한철 허애 김욱전 김양규 김정덕장군등이다. 6·25때 연대장으로 전사한 김룡배대령은 사후. 준장으로 추서돼 모두 28명이다.
1명의 육군참모총장(2명의 공군참모총장), 2명의 군사령관과 3명의 장관, 정보부장·감사원장등 2명의 각료급 배출은 5기의 역량과 기대에 비추어서는 오히려 아쉬운 느낌이 없지 않다.
이같은 5기의 상대적인 부진은 어쩌면 운명적인 맥락 같이도 보인다.
우리군과 정치의 역사적 전기가 되는 5·16군사혁명에서 5기는 실제 거사의 주역이었다. 2기 박정희장군을 중심으로 5기와 8기로 연결되는 혁명세력의 내부 갈등이 다수 5기생 혁명주체가 반혁명으로 거세되는 정치드라머를 연출했고 5기의 쇠퇴를 가져온 것으로 풀이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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