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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속에 살다간 최상덕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언론인이며 소설가인 최독견(본명 상덕)씨가 70세를 일기로 5일 별세했다. 20세에 상해일일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아 동지에 『유린』이란 중편소설을 연재한 것이 작가생활의 시작이요 처녀작이다. 그는 귀국후 24세때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승방비곡』을 조선일보에 연재, 많은 독자를 얻었으며 그의 예술적인 재질을 인정받아 확고한 작가의 위치를 굳혔다. 이 장편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시험된 영화소설로 발표돼 성공을 거둔 것이다.
최씨는 당시 정인익(6·25에 납북) 이서구씨와 더불어 일제하의 삼총사 민완기자였다. 가장 가까이 지낸 작가 이서구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독견은 재치있는 말솜씨와 유려한 그의 문장으로 일세의 명기자였다. 하루는 눈빛이 반짝이는 한 사람이 우리 기자 서클에 들어왔는데 상해에서 신문기자를 하다가 소설도 쓰고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서울 등장은 좀 늦었지만 뛰어난 재주로 곧 두드려진 기자가 됐고, 셋이서 어울리면 서슬푸른 일본관헌도 하나도 무서운 것이 없었다.』 승방비곡은 그 무렵의 작품이다. 삼총사는 이를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뜻을 모아 이서구씨가 제작을, 정인익씨가 뒷돈을 대어 무성영화를 제작했다. 이 트리오가 손대서 안 되는 일이 없었다.
35년에는 동양극장 지배인으로 이서구·박진씨등과 신극 발전에도 노력했다. 신극단 청춘좌, 호화선을 창립했고 조선음악연구회를 통해 창극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해방후 최씨는 평화신문·대구신보·서울신문·연합신문·세계일보등에서 편집국장·주필·부사장을 역임,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죠.』 서울신문에서 그가 편집국장일때 사장으로 있었던 박종화씨는 『여러모로 재간덩이었다』면서 부진했던 그의 말년을 못내 아쉬워했다.
최근 수년동안 어려운 가정형편에 노환으로 신음하면서 친지들에게도 알려지지않은 고생을 했다. 지난해에는 몇몇지기가 지금껏 살다가간 시민아파트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각박한 현실에 영합하려 하지않았다. 『아호 그대로 두견새처럼 혼자서 미련없이 갔습니다. 고고히 살다가 편안히 갔읍니다』고 이서구씨는 그의 인품을 추모한다. <권순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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