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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금은의 반출(상) 가장 길었던 3일(28)|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6·25의 서울 엑서더스(대탈출)에는 국가경제의 바탕이 되는 정부보유 금은의 반출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하마터면, 당시 한은에 보관중인 1t반(현싯가 12억8천1백만원)의 지금과 2t반의 지은(현싯가 7천5백만원)은 공산군 수중에 그대로 넘어갈 뻔했다. 여기 증인으로 등장하는 몇사람의 기민한 계획과 활동으로 그 북새통에도 4t의 금은을 무사히 피난시켜 국가경제의 파탄을 막을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이 금은의 반출을 다루기에 앞서 6·25 직전의 한국경제동향을 당시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있던 송인상씨(현한국경제개발협회회장·56)로부터 대충 들어보자.

<경제안정이룩하자 침략>
"1949년말에 정부는 재정안정 15개원칙을 발표하여 인플레억제와 물가안정에 역점을 두어 l950년 1월부터 6·25직전까지 처음으로 안정기조를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예금고가 자꾸 증가하여 49년 12월말에 지금 돈으로 따져서 6천5백50만원이던 것이 그 이듬해 5월말에는 6천7백20만원으로 늘어났지요. 화폐가치가 안정된 증거로 50년초부터 월부제도가 생겼어요.
그리고 국방비조달과 세입증대방안으로 지금 돈으로 1천만원의 건국국채를 발행하여 시내
각 동회로 다니면서 직접 팔았지요.
당시 국채광고 포스터가 북괴를 무찌르는 그림으로 돼있어 그들은 서울에 들어온후 나를 잡으려고 무던히 찾아다닌 모양입니다.
이렇게 한국경제가 본격적으로 안정기조를 이룩하여 성장 본괴도로 오르려던 참에 6·25가 터져 그 피해는 이루다 말할수 없었지요.
특히 토지개혁실시로 5년 상환의 지가증권을 받았던 지주들은 전쟁으로 화폐가치가 폭락하는바람에 토지자본이 공업자본화하지못하고 그대로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사회에 중추적역할을하던 이 지주계급의 돌연한 몰락은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돌이킬수 없는 타격을 준 셈이지요.
만약 그때에 토지자본이 공업자본화할 수 있었다면 한국경제도 자유중국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송인상씨의 이야기로는 6·25직전의 한국경제는 예금고가 늘어나고 월부제가 생기고 건국국채를 발행할 정도로 안정되어 성장단계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경제는 물론이려니와 전체 한국사회에 여러모로 큰 상처를 준 것이 6·25로인한 지주계급의 갑작스러운 몰락이라고 지적하고있다.
그럼 이제 본론인 금은반출로 화제를 돌려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기로하겠다.
사실 금은반출은 재무장관 최순주씨(작고) 다음으로 이 문제에 직접 책임을 지고있던 당시의 한은총재 구용서씨(72)의 기여가 컸었다.
칠순의 고령인데도 구용서씨는 그때 일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27일상오 9시께 국방부 제3국장인 김일환대령(현한전사장·56)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서 대뜸 금은문제를 어떻게 할거요? 라고 해요.
좋은 방법이 없소 라고 대답했더니 김대령은 가지고 나가야지요 라고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이런 전화를 받고 나는 곧 최순주재무장관을 만난다음 다시 국방부로가서 신성모장관을 뵈었지요.

<신성모국방에 반출간청>
신장관은 나보고 각 장관들이 다 피난나가는데 당신도 나가시오 라고 해요. 금은을 빼내야할텐데 군에서 반출해주어야 겠소라고 졸랐지요. 자꾸 사정을 하니까, 신장관은 헌병사령관 송요찬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한은총재실로 가라고 명령하더군요. 이때 마침 장관실에 들렀던 무초대사가 나를 보고 몸조심하시오. 미스터 구하고 걱정해줘요.
은행으로 돌아오니 벌써 송대령이 헌병대위 한명과 사병 15명을 데리고와서 장관으로부터 금은반출 호위명령을 받고왔다고 말해요.
발권부장 오정환씨가 송대령일행을 금은이 보관돼있는 장소로 안내했고 나도 뒤따랐지요. 그때 한은이 보관중인 금이 1·5t, 은이 2t반 가량이었소.

<재무장관은 먼저 피난가>
송대령이 처음 왔을때, 혹시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몰라 그를 보고 자결용으로 권총 한자루 달라했더니 옆에있던 헌병대위가 자기가 차고있던 것을 선뜻 내주어 여간 고맙지 않았어요. 이렇게해서 금은반출 준비는 다됐고, 27일하오 3시에 출발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27일 정오께 은행집회소에 있었는데 송인상 이재국장이 오더니 최장관이 벌써 피난갔다고 귀뜀해요.
장관과는 직접만나 여러 가지 상의를 하게 되어있는데 설마하고 회현동에 있는 장관댁으로 가보았더니 텅빈집에 경위 한사람만이 남아서 장관은 가방을 들고 나갔다는 거에요.
그길로 장관실로 갔더니 열쇠가 굳게 잠가져있어 할수 없이 백성욱내무장관한테로 가서 이럴수가 있느냐고 대들었는데 자기도 하오 3시쯤 집으로 가겠다는거예요. 이젠 할수없이 내 재량으로 일을 처리할 수 밖에 없게 됐단 말이야. 예정대로 하오 3시에 트럭 한대에 금은을 실었지요. 그러나 은행소유인 이 금은을 그냥 넘겨줄 수가 없어서 지금과 직원 두사람을 붙여서 이들의 책임하에 호송토록 했지요.
현장에있던 김일환대령에게 이들 직원이 만약 직무를 이탈하려는 눈치가 보이면 군에서 징발하라고 부탁했어요.

<군에선 김일환대령이 책임>
그래도 안심이 안돼서 국방부에서 금은후송을 맡되, 처분권은 없다는 내용의 보관증을 작성하여 신국방한테 또 갔지. 장관은 없고 마침 채병덕참모총장이 있기에 보관증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더니 작전관계가 아니어서 자기권한 밖이라고 해요. 그래도 책임자를 한명지명해달라고 졸랐더니 김일환국장을 지명해서 결국 4t의 지금은보관증에는 김대령이 서명하고 입회인은 채총장이 섰지요.
군을 대표하여 직접 금은운반에 책임을 졌던 국방부제3국장 김일환대령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한다.
"사태가 급해지자 국방부는 각 국장회의를 열고 국별로 업무를 분담했는데 나는 주로 군수물자릍 통제하는 업무를 맡기로돼 우선 한은지폐를 각군에 충분히 지급하는한편 한은이 소장하고있는 귀중물자를 소개시키기로 했지요. 그런데 가장 어려운 문제가 금은을 어떻게 무사히 반출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구용서한은총재가 그냥 내줄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보관증에다 국방부제3국장 대령 김일환이라 쓰고 도장을 꽝 찍었지요.
헌병사령관 송요찬대령과 1개소대의 헌병이 금은호송을 위해 차출되었고, 내 부하였던 정규섭씨(현외무차관보)가 은행으로 함께가서 자동차 두대에다 실어냈읍니다.

<시흥보병학교에 우선보관>
금은보관증에 도장을 찍어주면서 내용품목이 어떤 것인지 잘몰라 나중에 곤란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군요. 그래서 은행사람도 함께 가자고 했지요. 결국 구총재와 내가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금은을 우선 시흥보병학교까지 피난시켰읍니다.
그런다음 나는 다시 한은에서 돈을꺼내 각 군에 나누어 주려고 서울에 돌아오는데 한강에서 못들어오게 막아요.
겨우 뚫고 한은에 와보니, 조사부장 장기영씨가 마침 숙직을 하고 있어요. 장부장으로부터 돈을 받아 각 군에 현찰로 필요한 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금은은 시흥을 거처 한은대전지점금고에 넣어두었다가 진해에서 김익성해군소령이 와서 인수, 진해로 가지고 갔지요. 그래서 나는 금은수송책임은 대전에서 벗은 셈이지요.

<대전거쳐 진해해군창고로>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북괴군이 서울에 들어와 제일먼저 한은의 금은을 혈안이 되어 찾다가 없으니까 국방부 김일환이가 금덩어리를 갖고 도망쳤다고 방송까지 했다는 거예요. 나는 이 금은수송에 온 정신이 쏠려 가족도 한번 못보고 28일 새벽에 후퇴했어요.
국방부가 금은수송 책임을 언제 어디서 벗어났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구총재는 약간 다르게 증언하고 있다.
"27일하오 6시쯤 나는 자동차로 안호열 비서실장(고인)과 임송본 부총재와 함께 한강을 건너 시흥으로 갔지요. 물론 금은수송차량도 함께. 거기가니 채총장은 이제 군으로서는 금은수송 책임을 다했으니 나더러 책임지고 대전으로 가지고 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금은 트럭과 함께 28일 새벽 수원에 도착, 거기서 대전을 거쳐 진해해군창고에 의뢰, 보관했다가 다시 부산에 보내서 미상선편으로 미국연방은행 뉴요크지점에 수용했어요.

<종착지는 미연방은행>
재무장관이 관계자에게 별다른 지시나 연락없이 27일 상오중으로 피난길에 올랐을때 한은총재를 비롯한 실무자들도 당황, 그대로 흩어졌더라면 필시 한은의 금은은 온전히 보전하지못했을 것이다. 사태가 막바지에 다다랐을때 재무부와 한은으로서는 이 금은반출을 비롯하여 과단성있게 손을 써야할 몇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다행히도 재무부와 한은 관계자들은 장관이 없지만 이런 어려운 일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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