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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영친왕의 손아랫사람으로 영친왕이 항상 가엾게 생각하는 인물이 또 하나있었으니 그것은 8·15 해방직전에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죽은 이우 공이다. 이우 공은 고종황제의 둘째 아드님 의친왕(전리강공)의 제2공자로 태어나서 여섯 살 때에 운현궁 이준 공의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다.
1945년8월6일, 당시 그는 일본 육군 중좌로서 히로시마에 있던 서부군 관구 사령부의 고급참모로 있었는데 그날아침 일찌기 말을 타고 출근하는 도중에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고 아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때에 공의 나이 34세-한창 살 나이였다.
그때의 세계형편은 어떠하였던가. 소위 대동아 공영권을 만든답시고 미 영의 격멸을 부르짖어 깜냥 없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미영의 반격으로 말미암아 서전의 승리도 일장춘몽이요, 이미 점령하였던 지대도 모조리 빼앗기고, 이제는 오로지 본토를 수호하기에만 급급하던 때였었다.
그 반면 필리핀을 탈환하고 오끼나와를 점령한 미군은 일거에 일본 본토를 공략하려고 호시탐탐하였으며 얄타 비밀협정에서는 이미 소련의 대 일 참전이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한 미묘한 시기에 미국에서 갑자기 원자폭탄을 사용하게된 것은 첫째는 일본본토의 상륙작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먼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확보해 놓자는 심산에서였다.
원자폭탄은 그때까지는 세계의 비밀이었는데 트루먼 대통령의 결재로 6일에는 히로시마에, 8일에는 나가사끼에 각각 한 개씩 떨어뜨린 것이었다. 따라서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원자 폭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피해도 막대하였으니 히로시마란 도시만 하더라도 30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그렇지 않아도 날마다 밤마다 B-29의 폭격으로 도시라는 도시는 모조리 폐허가 된 때이었으므로 입만 벌리면 초토항전을 부르짖던 일제도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가 없음을 깨닫고 비밀리 전쟁종결의 시기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후 과연 8윌9일에는 소련이 대일 선전 포고를 하여 만주를 거쳐서 북한까지 점령하고 미군의 본토상륙작전이 임박하게 되니 그처럼 포악 무쌍하던 일제도 필경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제1호는 일본을 항복케 하고 동아의 정세를 일변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역사적 원자폭탄에 영친왕의 조카 이우 공이 참사를 당하게 된 것은 참으로 야릇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보다 먼저 이우 공은 본국에 귀성해서 약 한달 동안을 운현궁에서 지내었는데 그때 그는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일본으로는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항거하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가기 싫은 길을 억지로 떠났다고 하니 그의 희생은 결국 일제가 그렇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구 왕실의 왕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일본군인이 되고 일본의 군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비록 소극적이나마 항상 일본에 대해서 저항을 계속해온 이우 공이며 그는 지하에서도 더욱 통분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우 공의 유해는 그 이튿날 일 공군기로 서울로 공수되어 그리운 운현궁으로 들어갔으며 장례식은 조국이 해방되던 8월15일에 거행되어 양주 선영에 묻히게 되었는데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박찬주 여사(이우 공 비)와 이청, 이종의 두 어린 상제의 애처로운 모습이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런데 이에 한가지 특기할 사실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당시 이우 공의 부관으로 있던 요시나리라는 중좌가, 자기의 죄도 아니건만 책임을 통감하고 주인의 유해를 비행기에 실어서 한국으로 가도록 마련해 놓고는 즉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일본인이기는 하나, 그는 사무라이다운 사무라이였다고 하겠으며 그것도 역시 이우 공의 인덕의 소치가 아닌가 한다.
해방되던 해의 일이니까 벌써 25년 전의 이야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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