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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해방에서 귀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영친왕이 가장 염려하던 분 중의 한사람인 윤 대비(순종황제 비)는 어떻게 되었는가? 해풍 부원군 윤택영씨의 큰 마님으로 열 세살 때에 황태자비로 들어가서 나중에 황후가 된 분이다. 6·25동란 전까지는 창덕궁 내 낙선재에서 거처하였으나 1·4후퇴 때 구포로 피난 갔다 와서는 오랫동안 다시 창덕궁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정릉에서 고독한 세월을 보냈다.
6·25때에는 창덕궁에 침입한 괴뢰군이 의류와 패물까지 모조리 빼앗고 축출했기 때문에 늙은 상궁만을 데리고 거리에서 헤매다가 운현궁에서 한여름을 지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도 있다. 이조 5백년동안 황후로서 이분만큼 신산한 꼴을 맛본 이도 별로 없을 것이다.
순종황제는 민비로 유명한 명성황후의 아드님인데, 천성이 인자하고 효심이 지극하여 장래 좋은 임금이 될 것이 기대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어렸을 때에 독약을 마신 까닭에 아깝게도 불구가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순종이 여남은 살쯤 되었을 때 하루는 식후에 홍차를 마시었는데 차를 들자마자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궁중이 발끈 뒤집혔었다. 전의가 달려와서 검진한 결과 독약이 든 홍차를 마신 것으로 추측하였다. 다행히 목숨은 구하였으나 그 바람에 순종은 앞니(전치)가 모두 빠지고 오랫동안 병석에서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신히 건강을 회복한 그는 벌써 이전의 「순종」은 아니었다. 총명했던 정신은 흐려지고, 건강했던 육체는 기운이 빠져서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 홍차에다 무엇을 넣었는지는 몰라도 누구인가 장래 「왕위」를 노리는 자들의 소위였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음모는 과거 역사상에도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므로, 만일 문제를 일으킨 다면 궁중에 큰 파문이 일어날것이 예상되었다. 따라서 집안간에 피를 흘리게 될 것을 염려해서 그랬던지 문제를 크게 확대시키지 않고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이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거니와 가엾게도 순종은 일생을 폐인으로 지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분의 배필이 되었으니 윤 황후의 일생이 또한 불행했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윤 황후는 「황태자비」나 「황후마마」라는 헛된 이름 때문에 인생의 낙도 모르고 70평생을 생과부로 늙었으며, 아이를 낳은 일이 없으므로 시아버님 고종의 분부로 시동생 영친왕을 왕세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순종이 「황태자」로부터 「황제」가 된 것은 아버님 되는 고종황제가 연로해서 자연발생적으로 왕실의 대통을 이은 것이 아니라, 저 유명한 해아 밀사사건으로 일제의 강압을 못 이겨서 억지로 황제의 위에 오르게된 것이므로 효성이 지극했던 순종의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요, 윤비 역시 자기가 황후가 된 것을 덮어놓고 좋아할 수도 없는 처지였었다.
그리하여 황제와 황후로 재위한지 불과 3년만에 필경 망국의 통한을 품게되니 무엇 때문에 황제가 되고, 또 무엇 때문에 황후가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인 즉 1905년에 체결된 보호조약에 뒤이어서 「한일합병」을 결심한 일제가, 해아 밀사사건을 핑계삼아 강경한 고종황제를 물리치고 마음과 몸이 다 건전치 못한 순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어서 그 동안에 대망의 한일합병을 강행하자는 음모였던 것이다.
하필이면 나라가 망할 때에 황제가 되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3천리 강산을 송두리째 일제에 빼앗기고 말았으니 순종만큼 가엾은 임금도 별로 없을 것이며 그도 또한 죽어서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파란 많던 「한양조」(이조) 5백년의 역사도 제27대 왕인 순종황제로써 그 종막을 고한 것이었다.
따라서 영친왕은 항상 큰 형님 순종을 불쌍하게 생각하였고 새로 어머님이 된 윤 황후를 『대비마마, 대비마마』하고 그리워하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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