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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소설 - 은희경 'T아일랜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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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소설가 은희경에게 공간은 중요하다. 그는 "공간이 구체적이고 명확하지 않으면 인물의 동선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진 달]

우리는 은희경(54)을 읽으면서 언제나 모종의 기대감을 갖는다. 그것은 유려하고 세련된 문체 속에 매장된 어떤 불온함 때문이다. 은희경이 구축한 관계는 많은 경우 냉소적이고, 비관적이며 쓸쓸하다.

 사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그러니 우리는 은희경을 읽으며 이 불행한 삶에 대해 동의를 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새의 선물』(1995)부터 『태연한 인생』(2012)까지 작가는 그런 독자를 배반하지 않았다.

 올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도 그러하다. 예심위원인 권희철 문학평론가는 “너무 가까워지면 ‘관계’가 개인을 삼키고, 너무 멀어지면 ‘거리’가 고립을 낳는다. 그 둘 사이의 곡예술을 포착하는데 은희경보다 뛰어난 작가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고 설명한다. 이 작품은 이국 땅인 T아일랜드에서 외톨이가 됐던 엄마를 회상하며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아들의 이야기다.

 엄마는 아빠의 이혼 요구에 열세 살 아들의 유학을 핑계 삼아 이국 땅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낯선 언어와 지리 때문에 아들 없이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세계와의 단절을 경험하는 것이다.

  “10년 전, 미국 서부에서 2년 간 살았던 때의 경험이 기초가 됐어요. 소설 속 엄마는 낯선 세계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이 드러나죠. 그게 남편의 이혼 요구와 맞물리면서 우리가 알던 익숙한 세계의 질서가 그다지 견고한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돼요.”

 엄마는 이 고립감을 어떻게 이겨낼까. ‘은희경식’의 불온함은 여기서 나온다. 엄마는 중고제품을 내놓는 가라지(창고) 세일을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불행을 수집한다. 불행한 여인의 식탁과 초대받지 못한 처녀의 파티 드레스, 잊혀진 작가의 후회스러운 젊은 시절의 책을 사 모은다. 엄마는 ‘허기와 절망 그리고 죽음’과 쓸쓸히 연대한다.

 “고독이나 불행은 해소되거나 극복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연대하는 거라고 할까요. 그러려면 먼저 우리 모두가 이 무정한 세계에 내던져진 무력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 쉽진 않죠.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작가가 세계를 비관하는 것은 아니다.

 “저는 단지 겁을 내고 있는 거거든요. 소설 속 엄마처럼 이 세계가 결코 견고하지 않다는 걸 자주 실감하니까요. 죽음이라는 ‘센 것’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 곳에서 자기의 고독을 슬쩍 얹어놓음으로써 위로를 얻는 것. 그 정도예요. 어찌나 소심한지.”

 은희경은 지금 석 달 째 미국 뉴욕에 머물고 있다. 휴가나 여행은 아니고, 젊은이들 틈에서 학교도 다니고 숙제도 하고 시험도 보고 성적표도 받고 있다고 했다.

 “내 직업이나 나이를 떠나 그냥 혼자서 미숙한 이방인으로 지내보고 싶었어요. 꼭 무슨 견문을 넓히고 기능을 익히려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굳어진 패턴에서 벗어나고, 그래서 소설도 좀 달라졌으면 하고요.”

김효은 기자

◆은희경=1959년 전북 고창 출생. 95년 동아일보로 등단. 소설집 『상속』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장편 『소년을 위로해줘』 『태연한 인생』 등. 동서문학상·이상문학상·동인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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