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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미국판은 ‘가위질’ 해서 쉽게 만든다는데…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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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우리가 ‘설국열차’를 이해하기엔 너무 멍청하다는 거냐?”

지난주 주요 영화 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미국인 사용자들의 이런 불만의 글이 많이 올라왔다. 발단은 미국 인기 영화사이트인 트위치(Twitch)가 영국의 유명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스를 인용해 전한 소식이었다.

레인스의 주장에 따르면 ‘설국열차’의 북미 배급을 맡은 더 와인스타인 컴퍼니(TWC)가 봉준호 감독에게 영화 분량 20분 정도를 잘라내라고 요구했다는 거다. 이유인즉 “아이오와주와 오클라호마주의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설국열차’는 한국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북미 개봉일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트위치는 가위질로 악명 높은 할리우드 배급자가 미국 중서부 시골사람들을 바보처럼 취급하면서, “풍부한 함의를 지닌 공상과학(SF) 스릴러를 단순한 액션 영화로 만들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

그러자 ‘설국열차’의 국내 배급을 담당하는 CJ E&M은 와인스타인이 일방적으로 특정 분량 삭제를 요구한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 <코리아 중앙데일리 8월 9일자 11면 ‘bong changes ‘snowpiercer’ for u.s.’ 참조>

와인스타인은 “몇몇 긴 영어 대화들을 자막으로 읽는 한국 관객에게는 무리가 없으나 그대로 듣는 영어권 관객들은 오히려 소화하기 힘들다”며 협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봉 감독도 이를 받아들여 직접 북미판을 편집 중인데, 이 작업이 끝날 때까지 분량이 몇 분 줄어들지 알 수 없다는 해명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해외 블로그와 SNS에선 ‘설국열차’ 분량 조절에 대한 불평과 함께 ‘도대체 언제 개봉하느냐’는 질문이 올라온다. 이 논란을 통해 봉준호 영화에 대한 해외 팬의 애정을 엿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미국 시장에서 대중문화가 이른바 ‘덤다운(dumb down)’되는 경향에 대한 우려와 반발을 읽을 수 있다. 덤다운은 소설·영화 등의 문화 콘텐트를, 배경지식이 부족한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단순하게 만드는 걸 가리키는 속어다.

미국 언론인 크리스토퍼 콜드웰은 지난해 12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덤다운’되고 있는 미국 문화가 언제라도 타 문화에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위협적인 타 문화의 사례로 당시 유튜브 최초로 10억 조회 수를 기록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었다. 그러면서 콜드웰은 미국 아티스트들이 다민족·다문화사회인 미국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여러 다른 문화를 섭렵하기보다는 거꾸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요소들을 없애버리고 지극히 보편적이고 쉬운 것만 다룬다고 주장했다. “미국 사회는 다양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미국 대중문화는 동질적”이라고 그는 말했다.

덤다운되지 않은 영화에 대한 열망은 최근 북미에서 개봉된 SF ‘엘리시움’에 관한 AP통신 기사에서도 드러난다. 폐허 같은 지구에서 사는 한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든 치료를 받기 위해 상위 1% 부유층이 사는 우주정거장 ‘엘리시움’으로 쳐들어가는 내용의 영화다. 한국에선 이달 말에 개봉하는데, ‘설국열차’와 공유하는 주제가 많아 두 영화의 흥행 대결이 기다려진다.

AP는 생각 없는 수퍼히어로 액션 블록버스터들의 홍수 속에서 간만에 보는 “영혼이 담긴 SF”라고 ‘엘리시움’을 평했다. ‘설국열차’가 진작에 북미에서 개봉했다면 좋은 찬사를 먼저 들었을 텐데 참 아쉬운 대목이다. 여하튼 이 기사에서도 할리우드 영화의 덤다운에 대한 우려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덤다운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직까지는 한국 영화와 K-pop이 해외시장에서 신선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 드라마, K-pop에도 점점 큰 자본이 투입되는 추세다. 그런 만큼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려면 점점 더 큰 시장을 필요로 하고, 다양한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동시에 맞추기 위해 콘텐트가 무난하고 단순해져야 할지 모른다.

대자본을 투입할 수 없었다면 ‘설국열차’ 같은 영화를 제작하는 것 자체는 불가능했을 거다. 한국의 문화사업자들도 대형화와 덤다운의 위험 사이에서 어떻게 현명한 균형점을 찾을지 생각해볼 때가 됐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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