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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책 읽는 인간] 미술관의 확장 … 당신만의 작품을 뽑아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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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상상 박물관’을 만든 이는 관람객 뒤통수를 기웃거리며 황급히 그림에 눈도장을 찍는 것으로 만족할 필요가 없다.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인기작인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를 찬찬히 뜯어보면 구석구석 재미난 도상이 드러난다. [그림 휴먼아트]

상상의 박물관
앙드레 말로 지음
김웅권 옮김, 동문선
316쪽, 2만6000원

상상 박물관
필리페 다베리오 지음
윤병언 옮김, 휴먼아트
392쪽, 5만4000원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국립중앙박물관(덕수궁 석조전)에 갔던 기억이 난다. 40여 년 전의 일이라 그때 무엇을 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딱 하나 강한 시각적 인상으로 남은 것이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불상의 무릎에 수북이 쌓여 있던 지폐와 동전. 1970년대만 해도 한국인은 박물관에서조차 불상을 여전히 성스러운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는 『상상의 박물관』(1947)에서 박물관 속에서 예술작품의 의미가 어떻게 변하는지 지적한다. 예를 들어 제우스상이 신전에 놓여 있을 때는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지만, 박물관에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미적 감상의 대상이 된다. 그보다 십 수 년 앞서 독일 문예이론가 발터 베냐민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베냐민에 따르면, 박물관 속에서 예술작품이 ‘예배가치’를 잃고 새로 ‘전시가치’를 갖게 된다.

 귀족의 인물화가 가문의 저택에 걸려 있다고 하자. 후손들에게 그 그림은 가문 어르신의 초상이라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박물관에서는 다르다. 박물관의 관객들은 그림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굳이 따져 묻지 않는다. 그들은 차라리 그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구인지를 물을 것이다. 박물관에서 인물화는 추억이나 추모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감상의 대상일 뿐이다.

 박물관은 그림이나 조각에서 예술외적 의미-숭배의 대상이나 추모의 도구-를 벗겨버리고 그것들을 순수한 ‘예술’, 한갓된 ‘형식’으로 변화시킨다. 앙드레 말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박물관이 작품을 장소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시킨 것은 아니다. 가령 ‘모나리자’를 보려면 루브르 박물관으로, ‘봄’을 보려면 우피치 미술관으로 성지순례(?)를 떠나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 말로는 ‘상상의 박물관’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사진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박물관이다. 이 ‘벽 없는 박물관’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구조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지리적 제약도 없으므로 한 작품의 옆에 지구 반대편에서 가져온 다른 작품을 나란히 놓을 수도 있다. 한때 박물관에서 그랬듯이 복제기술로 지은 이 상상의 박물관에서도 작품은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상상의 박물관`의 저자 앙드레 말로와 ‘상상 박물관’의 저자 필리페 다베리오(오른쪽).

 원작이 사진으로 대체될 때 작품의 물질성은 탈락된다. 화포와 석재는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도 여전히 물질성(셀룰로이드)을 갖는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상상의 박물관’을 또 다른 차원에 올려놓았다. 디지털 사진은 비(非)물질적 이미지. 사진을 찍으러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다. 인터넷을 통해 퍼오면 그만이고, 원하면 ‘세컨드 라이프’와 같은 가상현실을 통해 아예 ‘상상의 박물관’의 건물을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나만의 박물관을 갖고 싶지 않은가. 이탈리아 예술평론가 필리페 다베리오의 『상상 박물관』(2011)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앙드레 말로의 발상을 연장시킨 것이다. 물론 두 박물관 사이에 차이는 있다. 말로의 박물관이 일종의 ‘아틀라스’로서 무한한 규모를 갖는 공적 박물관이라면, 다베리오의 것은 과거 귀족의 저택 같은 사밀한 공간에 마련된 사적 박물관에 가깝다.

 저자는 머릿속의 상상으로 먼저 가상의 저택을 짓는다. 반지하층 위에 3층을 올린 이 가상의 건물은 다양한 부분-안티카메라(정면 홀), 생각하는 방, 도서관, 그랑 살롱, 점심식사 방, 프티 살롱, 놀이방, 부엌, 그랑 갤러리, 침실, 음악실, 예배당과 정원-으로 이뤄져 있다. 이 다양한 공간의 벽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걸어놓고, 저자는 건물의 동선을 따라 걸으며 그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각 공간에는 그 공간에 어울리는 주제를 가진 작품이 할당된다. ‘도서관’에는 독서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들, ‘생각하는 방’에는 깊은 철학적 사유와 관련된 그림들, ‘음악실’에는 악기가 등장하는 그림들이 배치되는 식이다. 하지만 공간과 작품의 관계가 그렇게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공간과 거기에 배치되는 그림들 사이의 관계는 저자의 자유로운 연상에 따른다.

 기억술에 ‘로키법’이라는 것이 있다. ‘로키(loci)‘는 ‘장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로쿠스(locus)’의 복수형으로, ‘로키법’이란 외워야 할 항목을 건물의 구성요소와 1대1로 대칭시켜 시각적으로 암기하는 기술을 가리킨다. 그냥 외우면 더러 빼먹는 것이 있겠지만, 그것들을 건물의 영상과 연결시키면, 상상 속의 건물의 부분을 더듬어가며 암기했던 항목들을 빠짐없이 기억해낼 수 있다.

  저자의 독특한 기술방식은 로키법을 닮았다. 기억술에서 특정 항목을 건물의 특정 부분과 연결시키는 데에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의 연결은 오직 기억하는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듯이, 이 가상의 박물관에서 특정한 그림이 왜 그 방에 할당됐는지는 아마 저자 자신만이 알 것이다. 때문에 거기서 어떤 연결의 규칙을 발견하려는 독자는 이런 서술방식에 다소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독자는 저자의 저택에 초대받는다. 저자는 상상으로 지은 제 집의 이곳 저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자신이 그 동안 수집한 애장품을 자랑한다. 작품의 주제와 형식, 기법과 양식, 역사적 배경에 관한 저자의 설명을 들으며 독자는 색다른 경로로 서양미술의 역사를 되밟게 된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서울대 미학과(석사)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 『생각의 지도』 『미학 오디세이 1~3』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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