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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무책임 버스"에서의 기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메단 시가는 한때 식민지 자들이 있던 곳이어서 네덜란드 식 백색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포장도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의 거리는 어수선하고 또한 원주민의 거리는 도로의 폭만이 넓을 뿐,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먼지가 뽀얗게 일고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원주민의 유일한 건물이란 이슬람사원일 뿐, 미나렛에서는 알라신에 대한 기록문만이 스피커를 통하여 요란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열도의 나라 특유의 황혼이 깃든 불그스레한 저녁하늘에는 이슬람 사원의 돔과 미나렛이 우뚝 치솟아 있다. 이슬람 나라다운 광경이다. 먼지가 이는 거리거리엔 회교 모를 쓰고 여자 옷과 똑 같은 통치마를 걸친 남자들이 서성거렸다. 원주민들은 거의 초라한 모습들이다. 개발도상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살림살이들이 어려워 보였다. 지상·지하 자원은 풍부하지만 아직 개발하지 못했으니 「부유 속의 빈궁」이라고나 할까.
수마트라 메단 시의 조촐한 여관의 딱딱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쉬며 인도네시아 여행을 더 자세히 꾸며 보았다. 동남아의 오세니아 사이의 넓디넓은 해상에 3천여 개의 섬이 흡사 귀부인의 목걸이처럼 점점이 늘어서 있는 이 나라를 더듬어 보는 것이다.
다음날 이른 아침 우선 동서로 가로질러서 해안의 파당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탔다. 이 버스는 통로까지 자리를 만들었고 자리가 워낙 좁아서 무릎이 앞 의자에 닿았다. 게다가 지붕은 짐을 싣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천장이 낮고, 창문이 또한 낮아서 밖을 내다보려면 자라목처럼 목을 움츠려야했다. 지붕에 실은 짐은 일반 트럭의 적재량의 반은 될 듯. 짜부러 지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고달파 졸음이 와서 끄덕끄덕 졸다가 차가 갑자기 덜컥하는 바람에 버스 벽에 호되게 부딪쳤다.
몹시 아프기에 손을 대보니 피가 묻었다. 알고 보니 여기저기 나와 있는 나사못에 찔린 것이었다. 얼마나 거칠게 만들었기에 나사못들이 삐죽삐죽 나와있을까. 정말 무책임하게 만든 버스였다.
상처는 크진 않지만 피가 나오기에 무엇으로 대야할까 하고 망설이는데 마침 근처에 앉아있던 어떤 여성이 핸드백에서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며 내 머리에 대주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금방 피가 멎을 테니 염려 마십시요』라고 했으나 그 여성은 마다하며 행커치프를 상처에 고히 대주었다. 그리고는 『피가 멎을 때까지 꼭 대고 있으세요』하며 내 손을 그 상처자리에 갖다 대주었다. 낯선 나라 사람, 특히 남자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못내 고마웠다. 이런 버스를 타려면 철모를 써야 할까보다고 말했더니 그 여성은 가무잡잡한 입술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폭소를 터뜨렸다.
갑자기 친해져서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처음엔 그리 잘 생기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고마움을 받고 보니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이 여성은 자기가 먹을 도시락을 내어주며 먹으라고까지 자꾸만 권했다. 머리의 상처를 입은지 서너 시간 흘렀기에 행커치프를 떼어 보니 상처는 말라붙은 듯했다. 피묻은 행커치프를 도로 주기도 겸연쩍어 하난 사주겠다고 했더니 펄쩍 뛰며 사양했다. 그리고는 마치 잔·발장에게 은 촉대를 주는 어진 미셸 사제와도 같이 『그 피묻은 손수건을 제가 간직하면 좋은 기념이 될 테지만 선생님이 더 필요하실 테니 그냥 가지세요』하는 것이 아닌가. 낯선 나라의 남성들끼리는 이렇듯 멋진 우정, 어쩌면 이성애보다 더 큰 국제애의 멋이 있는 모양이다.
이 여성과의 데이트 안니 데이트를 너무 이야기하면 가슴 태우겠으니 그만 두는 것이 좋을 듯. 어쨌든 이 여성은 나이팅게일이 아니라 나에게는 단테의 영겁의 애인 베아트리체와도 같은 신비의 여인으로만 느껴졌다.
이 버스에서 머리에 상처를 입은 때문에 더욱 친하게된 이 여성은 중간지점에서 내려야 한다면서 별리를 아쉬워했다. 이 여성은 내게 이그조틱한 그 무엇이 있어서 어떤 매력을 지닌 지는 모르나 나에겐 마돈나의 사랑과도 같은 자비로만 느껴져서 에로틱한 상념을 품을 수가 없었다. 이 여성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살라맛 팅갈』(안녕히 가셔요)이라고 하며 그 가무잡잡한 손을 흔들었다.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눈물 흘릴 때라고 노래한 사람도 있지만 석별 때의 그 애달픈 표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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