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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장 길었던 3일(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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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괴남침이 있은 후 이대통령이 직접국민에게 사태를 담화로 알린 것은 27일 밤 10시부터 서너번 되풀이된 KBS의 녹음방송이 처음이었다.
25일 상오 10시쯤 남침 제1보를 받은 대통령은 경무대에서 각 장관들에게 개별적으로 지시를 내렸고, 전체 각의는 주재하지 않았다(임병직씨 말).
26일에 열린 국회에서도 대통령을 비롯한 각 장관의 출석을 요구했지만 신국방과 백내무만이 나와 전황을 보고했다(김용우씨 말).
당시의 경무대 비서 민복기·고재봉·황규면씨와 그 밖의 측근자들 말을 종합해보면 대통령이 외부원조요청, 즉 대미교섭에 바빠서 다른 일을 돌아볼 경황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국민은 대통령의 한마디를 목말라 고대하던 참에 문제의 녹음방송이 보도된 것이다. 적이 서울 시내에 들어오기 4시간 전에 그리고 적침 후 66시간만에 국민은 처음으로 대통령 담화를 듣게된 것이다.
적의 서울침공을 바로 눈앞에 두고 안심하라는 대통령 담화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가? 이 녹음방송의 진상은 이대통령 피난 때의 유일한 수행비서였던 황규면씨(현 사업·56)로부터 들을 수 있다.

<미 대사, 유엔 결의를 전달>
『27일 하오 6시쯤으로 생각되는데 그날 새벽2시에 서울에서 피난길에 올라 일단 대구까지 내려갔던 이박사가 다시 북상하자고 고집하여 대전까지 되올라 왔을 때입니다. 그 이유는 한 발짝이라도 서울로 가까이 가야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일행은 대전에서 잠깐 쉴 생각으로 철도사무실 2층으로 올라갔는데 신장관이 수원서 전화를 걸어 왔어요. 서울근교에 적이 들어왔다면서 대통령의 북상을 애원하다시피 말리는 눈치였어요. 그래도 이박사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이때 미대사관의 참사관 드럼라이트가 내려와서 황급히 무초 대사의 말을 전하더군요. 즉 유엔에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 경위와 그 결과로 얻어진 유엔의 결의와 미국의 태도를 공식으로 전한 것이지요.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도록 처음 결정을 본 것이 이 때였습니다. 이박사는 하오 7시쯤 이영진 충남지사관사로 들어갔는데 이때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내려온 무초 대사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원고정서도 못하고 방송>
그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투로 이박사께 전쟁은 이제부터 각하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 미국의 전쟁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하긴 지금 생각하면 역사적인 함축성 있는 말이었지요. 이박사께서는 무초 대사와 만난 다음 국민을 안위하기 위해서라도 방송하는 것이 좋겠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이철원 공보처장도 들어왔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나를 보고 방송원고를 구술할 터니 어서 받아쓰라고 해요. 방송은 그날 밤 10시에 내보내야하므로 이박사의 구술을 다시 정서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나는 붉은 색연필로 이박사의 구술을 받아썼지요. 그 내용은 대강 UN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이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공중으로 군기·군물을 날라 와서 우리를 도우니까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는 취지였지요. 문장의 서두를 다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박사께서는 즉시 전화 수화기에 대고 구술하신 원고를 읽으셨지요. 이것이 그날 밤 나간 대통령의 녹음방송입니다.』
황규면씨의 말과 같이 이대통령이 27일 밤에 녹음방송을 하게된 것은 미국의 참전소식을 미 대사로부터 공식으로 보고 받고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생각에서였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또한 이 방송을 듣고 여러 서울 시민들이 마음을 놓고 피난가지 못한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 기록에 남겨야할 것은 27일 하오 4시께부터 『맥아더 사령부전방지휘소가 28일에 서울에 설치된다』는 방송보도와 함께 벽보가 나붙었다는 점이다. 이것 또한 와전된 과장보도였다.

<문인들, 낙관방송 중단 종용>
실은 트루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맥아더 원수가 존·H·처치 준장을 단장으로 하는 15명의 현지시찰단을 27일에 한국에 파견하게 된 것이 그렇게 와전됐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미국이 지상군을 한국에 투입하라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기)
그럼 이제 이대통령의 녹음방송을 직접 다룬 홍천 중위(당시 정훈국 보도과 방송계장·현 주일공보관장·50)의 근간의 경위를 물어보자(주=소동오 주일본사특파원회견).
『앞서도 말했지만 27일 저녁 8시까지는 그런대로 프로를 메워나갔는데, 그 다음부터 엉망이 됐어요. 그런판에 10시 좀 전이라고 기억되는데 정훈국에서 대통령의 담화녹음을 보내왔어요.
즉시 내보내라는 겁니다. 그래서 10시 정각뉴스에 내보냈는데 들어보니까 현지 사태와는 대단히 거리가 먼 거예요. 방송국에서도 지층을 울리는 듯한 적 포성이 들려오고 국원들도 태반이 없어졌지 않아요.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한낱 육군중위의 신분으로, 또한 대통령 담화고 보니 안낼 수 있어요. 11시까지 서너 차례 대통령 담화를 방송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프로를 메우기 위해 와있던 앞서도 말한 사회명사와 문인들이 이젠 그 담화를 더 방송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나도 동감이어서 그 다음부터는 중단했습니다.

<27일 밤 12시로 KBS종막>
그때 27일의 기나긴 밤을 회고할 때 나는 두 가지 점에서 자책감을 느낍니다.
하나는 그 녹음방송 때문에 여러 시민이 피난 못 간데 대해 일련의 책임을 느끼며 다른 하나는 8시부터 프로가 제대로 못나가 결과적으로 적에게 이편의 혼란상을 알리게된데 대해서 역시 자책감을 가집니다.』
KBS방송은 27일 밤 12시로 끝났다. 그래도 28일 아침 5시부터 나갈 프로를 대충 마련한 홍천 중위의 군방송요원과 그때까지 남은 방송국 직원 10명은 GMC 트럭1대에 중요기재를 실어둔 채 새우잠을 청했다. 홧김에 무명소주를 들이킨 홍천 중위는 국장실소파에서 졸다가 상오 2시쯤 밖 공기가 이상하다는 박능상 조종계장의 말을 듣고, 명동에 있는 정훈국과 연결된 직통전화를 아무리 틀어도 대답이 없었다.
허둥지둥 잔류 전 직원을 트럭에 태우고 용산 삼각지까지 겨우 빠져나갔으나 인파와 거파로 그 이상 전진 못하고 각개각진, 다시 말해 분산 각자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홍천 중위 일행이 정동방송국을 철수하고 얼마 안되어 북괴군공작원이 방송국에 침입한 후에도 대한민국방송은 28일 정오 7시45분까지 계속되었다.
이 수수께끼를 김성배씨(당시KBS조종실근무·현 방송관리국시설계장·42)를 통해 풀어보자.

<송신소에서 한동안 방송>
『그때 중앙방송국의 방송은 정동연주소로부터 연희송신소를 거쳐서 비로소 방송이 돼나갔지요. 연희송신소가 신촌에 있었는데 이곳에 나가있던 중계과 라디오 중계계장 이성실씨(고인)가 정동방송국이 적군에 점령된 후에도 방송을 계속 했습니다.
이계장이 정동연주소로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통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임시스튜디오에서 비상레코드를 틀어 음악과 콜·사인만으로 방송을 계속한 거지요. 정동방송국에 침투한 북괴공작원이 기계관계를 몰라서 그대로 두었는지, 혹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이용하려고 그냥 두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중앙방송국의 피날레는 정훈국 보도과장 김신수 대령(당시31세)의 장렬한 전사로 막이 닫힌다.

<군인가족이 먼저 내뺄 수야>
적 침공 후부터 한강폭파까지 사실상 국민의 유일한 뉴스·소스였던 정훈국 보도과의 낙관적인 전황발표에 대해서는 비판이 많다. 그러나 따지고 본다면 이 책임은 보도과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장 김신수 대령의 전사모습은 당시 보도과장 지프를 직접 운전했던 김재석 2등 상사(현 육군소령·육본병참감실근무·41)로부터 상세히 들을 수 있다.
『내가 김대령 차를 몰게된 것은 우연한 인연 때문이었지요. 전속 운전병인 한 1등병이 휴가를 가고 새 운전병이 좀 서툴러서 내가 대신하게 된 거죠. 그때 나는 홍천 중위 밑에 방송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26일 하오부터 말하자면 차출되어 김대령 차를 운전했습니다. 27일 하오 2시쯤에 용산에 있던 김대령관사로 갔는데 그분이 조용히 소지품을 정리해요. 사진과 신문 스크랩 등 한 20권되는 물품을 나보고 태우라는 겁니다. 옆에서 부인이 말없이 울고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부인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니까 고향(전남보성벌교)에 가 있다가 전세가 좋아지면 다시 오구려.
다시 부인이 그럼 지금 피난가나요라고 물으니까, 김대령은 지금은 안돼, 서울 장안 사람들이 지금 누구만 쳐다보고 있는지 생각해봐요. 군인가족이면 차를 탈수 있다고 먼저 달아날 수 있겠소? 친척집에 잠시 피했다가 고향으로 가요라고 타일렀습니다. 정말 나도 저절로 눈물이 나더군요. 이때 같이 하숙하고 있던 내 동생 생각이 문득 나요. 25일 비상 때 하숙을 나은 후는 동생을 못 봤거든요. 부인과는 집에서 작별했습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김대령이 부인을 친척집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후 나는 김대령을 모시고 잠시 육본에 들렀다가 미군 고문단의 모터풀 앞에 이르렀습니다. 보니까 한국 사람 종업원만 몇 있고 미군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새 지프는 10여대 그냥 있고요. 김대령 차가 좀 헐었기에 한 대 빌리라고 하니 그냥 가져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새 차와 바꿨습니다. 27일 하오 5시쯤 새차를 전속력으로 몰고 미아리고개로 갔습니다.
이쪽에서 포로 멀리보이는 적탱크를 쏘아대는데 연기가 사라지면 그대로 끄떡도 안 해요. 그러나 이편에 군대가 꽉 차있어서 마음은 든든했습니다. 6시쯤 방송국에 돌아왔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때 김대령께서 시민은 거리에서 서성대지 말고 집으로 돌아 가십시요라는 내용의 방송을 직접 한 것 같아요.

<적 1명 쏘고 김대령 전사>
27일 밤 10시쯤 다시 육본으로 갔으나 이때는 육본에도 별로 군인이 많지 않아요. 또 명동 정훈국으로 돌아왔는데 김대령은 나를 보고 고단하지, 좀 자. 운전은 내가 직접 할께 해요. 그래서 3층에 올라가 잠깐 눈을 붙였는데 김대령이 차를 직접 몰고 나갔다가 돌아온 것이 28일 새벽 1시쯤입니다. 3시쯤 김대령이 방송국으로 또 가자하여 눈을 비비며 차를 몰았습니다. 이때 내 생각에도 사태가 좋지 않다고 느껴 어떻게 괜찮겠습니까하고 물어보았지요. 앞서도 말한 내 동생 걱정도 되고 해서요. 김대령은 글쎄 한 마디만 하고는 묵묵무답이었습니다.
정동방송국 정문에 다다르니까 세단 드리쿼터 등 두 세대의 차가 서있어요. 김대령은 차에서 내려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고 나는 차를 좌회전시켜 발동을 끄고 막 운전대에서 내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누구야 김대령이다 하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소리가 났습니다. 3시쯤이니까 아직 어둡지만 처음엔 사무실 쪽에서 3, 4명의 적이 어른거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어요. 제 생각으로는 김대령이 그 중 한 명을 먼저 쏴 쓰러뜨린 것 같아요. 그 다음에는 방송국 안에서 난사가 쏟아져 나왔지요. 잠시 엎드려 있던 것까지는 생각나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차를 몰고 정훈국까지 왔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김대령 전사의 유일한 목격자인 김재석 소령의 증언은 이 정도로 그치고, 당시의 여러 정훈 장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육본이 서울 철수를 결정했을 때 김대령은 방송국 파괴 책임을 맡고, 그 임무를 수행하다가 적탄에 쓰러졌음을 알 수 있다.
북괴 남침 후 대령으로서는 더욱이 정훈국 소속 장교로서는 김현수 대령(준장추서)이 전사 제1번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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