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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몸바친 기미 제34인|고…스코필드 박사…그의 평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생전에 『내가 죽거든 제2의 고향인 한국에 묻어달라』고 원했던 스코필드 박사가 그의 소원대로 우리 나라에서 영면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발을 디딘 것은 54년 전인 1916년. 일본 총독정치의 횡포가 극에 달하던 때였다. 캐나다로부터 선교사로 이 땅에 온 스코필드 박사는 당시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있으면서 틈나는 대로 한국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이상재 선생 등 그때의 국내 민족지도자들과 만나 우리 나라의 앞날을 자기 일처럼 걱정했다.
당시 학생이던 김원벽 이갑성씨 등과는 거는 매일같이 밀회를 갖고 해외정세를 파악하는 등 민족거사를 위한 사전모의를 함께 하기도 했다.
기미년 3월1일 독립운동이 터지자 스코필드 박사는 갓 서른의 혈기로 나라를 찾으려는 한국인의 투쟁에 호응, 독립을 찾으려는 우리민족의 외침과 일제의 만행을 낱낱이 카메라에 담아 기사와 함께 외국신문에 보내 국제여론을 일으켰었다.
그해 3월5일 제2차 대시위 때 태극기를 든 수만 시민들이 대한문 앞에서 만세를 외쳤을 때 녹색 양복을 입은 스코필드 박사가 왼쪽다리를 절룩거리며 군중들의 사진을 찍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유광렬씨는 회상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 시내뿐만 아니라 수원 등 지방에서도 만세운동이 있다는 소식만 들으면 자전거를 타고 달러가 마구 사진을 찍어 댔다고 이용설씨는 말했다. 그는 이렇게 찍은 사진의 필름을 여자선교사들의 브래지어 속에까지 숨겨 해외로 보냈다.
스코필드 박사는 영자신문 서울·프레스에 기고하여 일본 총독정책의 부당성을 비난하기도 했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이윤희 여사 등을 찾아가 위로하기도 했다.
그는 국제여론을 일으키는 외에 하세가와 총독과 야마가다 정무총감 등을 찾아가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중지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스코필드 박사는 일본경찰의 미움을 받게됐고 마침내는 일본 고등계형사 오오이시의 미행감시를 받게됐다. 그러나 스코필드 박사는 계속해서 1919년 동경에서 열린 극동지역파견 기독교선교사대회까지 나가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고 일본수상 하라 등 고관들을 찾아가 총독정치를 중지하고 한국인에게 독립을 주라고 대들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해외에서도 한국 소개운동을 펴는 한편 3·1운동 당시의 견문록인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자를 발간, 캐나다와 미국 각지에 배부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해방된 뒤 다시 한국에 오기는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8·15경축식에 참석했었다. 그 뒤 그는 캐나다에 돌아갔다가 작년 3·1절 기념식에 다시 초대되어 한국에서 살아왔던 것.
지난해 2월26일 원호처가 마련해준 서울마포아파트3동108호실에서 뇌동맥경화증과 폐기종으로 병상에 누웠던 스코필드 박사는 병세가 악화, 국립의료원에 옮겨진 뒤에도 항상 『제2의 조국인 한국에 뼈를 묻겠다』고 병상을 지켜온 태신자양에게 말해왔다는 것.

<스코필드 박사 영면>
3·1 운동의 증인으로 독립선언서서명 33인에 이어 34인으로 불리어온 프랭크·W·스코필드 박사가 12일 하오 3시15분 입원중이던 메디컬·센터별관 3층5호실병상에서 81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고 스코필드 박사는 노령으로 폐기종 및 폐섬유증을 일으켜 지난 2월20일 메디컬·센터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으며 그동안 여러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회복했으나 11일 저녁 7시40분께부터 다시 병세가 악화, 혼수에 빠진 뒤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고 스코필드 박사의 임종은 양아들 이영조씨(55·서울농대교수), YMCA총무 전택부씨, 주치의 나하연씨 간호를 맡았던 태신자양과 몇 종교인이 지켜보았으며 양딸인 임종희양(28·미국캘리포니아 신대재학)은 미국에서 대어오지 못했다.
고 스 박사의 유해는 4시45분 YMCA2층 소강당에 마련된 빈소에 옮겨 태극기와 캐나다국기가 나란히 덮여 안치됐다.
한편 정당·종교졔·학계 등 인사 20명으로 장례위원회는 13일 상오 11시 모임을 갖고 장례식을 사회장(위원장 이갑성옹)으로 결정, 기독교식 5일장으로 집행하기로 했으며 장지는 국무회의에서 결정되는 대로 국립묘지의 독립유공자묘역에 매장키로 했다.


YMCA2층 소강당에 마련된 고 스코필드 박사의 빈소에는 박대통령의 조화를 비롯 국무위원일동이 보낸 조화 등 30여개의 화관이 애도의 뜻을 표하고있는 가운데 13일 상오 11시까지 정일권 국무총리 윤보선씨(전 대통령) 백락준 박사 김형석 교수 김상돈씨 여운홍씨 이인씨 정일형씨 오재경씨 등 1백40여명의 저명인사가 다녀갔다.

<유산은 2천5백불>
13일 공개된 스코필드 박사의 유언장에는 유산 2천5백77달러 가운데 1천달러를 YMCA에, 1천5백달러를 유림보육원에 각각 기증하도록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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