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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모자부 시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현대인은 바쁘다. 무대공간이 무한히 넓어지고 작업량이 누적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특히 더 바빠진 것은 아버지들이다. 아침부터 차를 잡느라고 뛰기 시작하는 이들은 저녁 늦게 극도의 피로감을 안고 들어와 쓰러지기가 일쑤다. 그리고 이 같은 생활은 종래의 가장에 대한「이미지」를 변질 시켜놓고 있다.
우리말엔 자친·자당·자모가 있고 엄친 또는 엄부란 것이 있다. 자는 어머니요 엄은 아버지다. 이것은 인자한 분이 어머니요 엄한 분이 아버지란 뜻이겠다.
그런데 이같은 설명이 과연 요즈음의 어린이들에게 실감있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인지?
원래 자친이니 엄친이니 하는 말은 지난날의 사회제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옛날의 아버지들은 현대사회의 가장들과는 아주 달랐다. 비록「바깥양반」이란 별칭이 있기는 했지만 요즈음의 가장들처럼 마치 나그네 하숙집 드나들 듯 온종일 밖에서만 사는 바깥양반은 아니었다. 그들에겐 [사랑 양반]이란 별칭도 있었다. 온종일 사랑방에 점잖케 앉아서 큰 기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랑양반이었다.
또 그들도 벼슬을 하면 관아에 출입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직장은 항상 가까운 이웃에 있었고 퇴청후 술을 마셔도 대개는 자기네들 사랑방에서 어울렸다. 그리고 양반이라하면 아침부터 갓 쓰고 앉아서 문안을 받고 큰 기침과 엄한 분부와 회초리로 집안을 다스렸으니 문자 그대로 엄부일 수 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자식들의 응석과 하소연을 받아줄 유일한「민원상담역」은 어머니였으니 어머니는 자모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와 반대가 된것이 아닐까? 가정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요즈음엔 어머니들이 점점 엄해지는 반면에 아버지들은 길들인 야수처럼 온순해져가는 것이 눈에 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최근의 유행어처럼 이것 역시「여성상위시대」의 필연적 결과인 것일까?
그러나 사실은 좀 더 색다른 원인이 있는 것 같다.「모델·케이스」로서 사회적 명성과 지위가 있고 활동가인 남자 몇명만 골라 보면 대개 그 이유가 짐작이 간다. 그런 남자들이라고 하면 대개는 그 외모에도 위엄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남자들 치고 집안에서도 위엄주의로 버티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럴 구실이 없고 또 그럴 체면과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위엄을 세우려면 집안사정에 정통하여 큰 소리칠 자료조사가 되어있어야 하거늘 온종일 밖에서만 사는 이들이 무얼 안다고「국내사정」에 언급하고 잔소리를 할 수 있으랴! 이것이 위엄을 못 부릴 첫째 이유요, 둘째는 그럴 체면이 없기 때문이다. 귀가가 늦는 것은 활동가인 가장에게 현대 생활구조가 강요하는 부득이한 결과지만 그래도 온종일 자기만을 기다렸을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면 대문안에 들어설 때 미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교양있는 가장들의 솔직한 실태다.
그리고 엄부가 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귀가 후의 복장때문이다. 옛날엔 방안에서도 갓 쓰고 앉아서 위엄을 부린것이 아버지였지만 현대의 아버지들은 귀가와 함께「넥타이」를 풀고 모든 긴장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헐렁헐렁한「파자마나 입고 축 늘어져 있기가 일 수이니 무슨 위엄이 따르랴!
이렇게 되면 집안의 용돈 지출, 풍기 단속등 중책의「바통」은 여자가 이어 받을 수 밖에 없는 일이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은 자모·엄부가 아니라 엄모·자부의 시대로 세상이 바뀌어간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엄모는 좋지만 제발 엄처까지는 되지 말아 주었으면. 현대사회의 남편들이 그처럼 밖에서만 나도는 것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모든 남자들이 반드시 유흥을 위해서만 그 모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테니까 오해와 불신이 동기가 된 엄처만은 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김우종<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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