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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손병희 묘 곁으로 간 천도교 별관|봉황각-그날의 함성 되새기는 삼·일 운동|글 박현서<한양대조교수·국사>|사진 구태봉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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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삼·일 운동의 요람일. 왼편 한옥이 1919년1월5일부터 49일 기도회를 열어 이신환성의 정신으로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던 천도교의 도량인 봉황각. 오른편이 천도교 중앙총부 별관(붉은 벽돌2층). 1918년에 착공, 1921년에 준공된 중앙총부 별관은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현 교당 자리에 현대식 15층「매머드」수운 회관이 세워짐에 따라 작년7월 성북구 우이동 254 희암 손병희 묘소 가까이에 있는 봉황각 옆자리에 이전되었다. 손병희의 미망인 주옥경 여사(77) 가 지난날을 되새기며 봉황각 앞뜰에 나와 섰다.
무네미(수유이) 너머 수락산의 지봉이 스러지는 곳에 봉황의 날개가 펼쳐져 있다.
벚나무 우거진 적막한 숲 사이로 희망과 소생을 안겨다주는 서조의 웅자가 엿보인다. 아직 싹이 움트기에는 이른봄, 나무 가지들은 양춘을 받으며 멀지않아 꽃망울을 펴 그 아름다운 자태를 경염하리라.

<손병희 선생이 세운 도장>
이곳은 민족의 분화구의 진원지. 반세기전, 정확히 말하면 51년 전 삼·일 독립운동 발상지의 하나이다. 겨우내 가지만 앙상했던 벚나무 가지에 윤기가 돌고 새싹이 움터나듯, 모멸과 억압의 질곡 밑에서 겨레가 소생하려는 울분을 터뜨리던 삼·일 운동의 산실이 여기 있다.
봉황각이 세워지기는 1912년. 당시만 해도 서울 도심지에서 40리나 떨어진 한적지. 벚나무 숲이 우거져 경승을 이루기에 의친왕 이강의 권유대로 천도교에서 사들인 6만평의 산야. 여기에 교주 손병희가 수련도장으로 세운 것이 봉황각이다. 인내천 사상의 연성수심을 위한 기도회와 세법이 때때로 거행된 도장이다.

<최남선 송진우 등과 협의>
민족의 독립을 만방에 천명하고 이를 쟁취하려는 슬기로운 거사에 대비하여 천도교에서는 독자적으로 그해 1월5일 사십 구일 기도회를 여기서 개최하였다. 한편 손병희는 가회동과 동대문 밖 상춘원에 우거하면서 최린을 통하여 최남선 송진우 이승훈 등 동지들과 독립거사의 모의에 골똘하였다.
동학의 개벽사상은 보국안민·광제창생의 창교 이념에서 필연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수탈과 압박의 동면에서 깨어나 분노의 용암은 지각을 깨고 분출하였다. 온 겨레가 갈구하던 민족의 독립을 비폭력적인 대중시위로 쟁취하려는 민족의 성사이었다. 우이동 봉황각에서 뿌려진 이신환성의 염원은 대한독립만세의 함성과 태극기의 물결로 번져 방방곡곡에 메아리졌다.
봉황각은 강당 별실을 합쳐 60간의 한옥, 그 북쪽에 별채를 지어 의암이 기거하였고 지금은 그 미망인 주옥경 여사가 살고 있다. 그리고 봉황각 뜰 앞에는 경운동 교당 자리에 있던 중앙 총부 별관을 작년에 옮겨 사인여천사상과 독립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오늘의 젊은이의 배움터로 활용중이다.

<별채는 미망인이 지키고>
천도교에서 원래 경운동 교당을 짓기로 한 것은 1917년께, 현대식 3층을 계획하였으나 일경의 간섭으로 착수치 못하였다. 당시 호일 백만이라는 전국 교도들의 성미에서 거둬들인 위원은 어느 교파보다 천도교의 재정 상태를 유족하게 만들었다.

<적주의 독립운동도 지원>
그러나 일제는 기부금 금지의 조례를 들어 성미거출을 금하였다. 대안동 교당이 협소하여 교당을 신축하려던 참이라 손병희는 1918년 겨울 경운동에 현교당을 새로 짓기로 하여 난국을 미봉하였다. 삼·일 독립운동에 소요되었던 막대한 거사자금이 천도교의 이 위원에서 은밀리에 교부되었음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파리 강화회의 파유 사절에 수교한 액수미상의 자금, 만주 안동에 송금된 6만원, 기독교 측에 대여된 5천원 등은 그 두드러진 예이다.
뒤로 도봉·오봉의 영봉이 병풍을 이루고, 앞으로 수유의 광야가 트인 적막의 별천지. 지금은 도심의 진속이 밀어닥쳐 꾀꼬리 우짖는 소리조차 듣기 힘들게 된 우이동 언덕배기에 아직도 그날의 열망과 감격을 안은 채 봉황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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