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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동산에 「달」이 지다|김활란 여사 빈소 조객 줄 잇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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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병인 당뇨병 등으로 연 6일째 혼수 상태에 빠졌던 김활란 여사는 10일 밤 8시 8분 그가 52년간 가꾸어온 이대가 내려다보이는 「새집」(서대문구 대신동 85의1) 2층 동쪽 끝 4평 남짓한 침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배꽃 면류관을 쓰고 회갑 때 입었던 「베이지」색 공단 치마저고리를 입고 평소에 쓰던 분홍색 수이불을 고이 덮은 채 좋아하던 「프리지어」와 「카네이션」속에서 잠들었다.
이날 밤 비보가 전해지기가 바쁘게 최규남 전문교장관, 이숙종 성신여대 학장, 수양 아들인 김일환 국제 관광 공사 총재, 오재경 전공보부 장관 내외, 백락준 연세대 명예 총장 내외, 허정 전국무총리 내외, 김종필씨 내외, 박 에스터 YWCA 고문, 모윤숙 여사, 전택보씨 등 고인의 동료·친지·정계·학계·종교계 저명 인사들이 연달아 어둠에 묻힌 대신동 고인의 자택으로 달려왔다.
이들은 차례차례 고인 앞에 묵념을 올린 뒤 저녁 9시30분부터 1층 응접실에 모여 한준석 교목의 집례로 찬송가 67장 「주는 나의 목자」를 부르며 기도회를 올렸다.
임종을 지킨 김옥길 이대 총장은 『선생님은 모든 조사를 그만 두고 승리의 노래와 영광의 찬송을 들려 달라고 말씀하셨다』면서도 『선생님은 일생동안 한마음을 가지고 사셨다』며 끝내 흐느꼈다.
여사의 유해는 11일 새벽 5시에 입관, 초록색 교기에 싸여 아침 7시 빈소인 이대 중강당에 옮겨져 고인이 늘 즐기던 「시클라멘」꽃 십자가 앞에 안치됐다.
빈소인 중강당 정면 벽에는 지난 58년 이대 학장 김인승 화백이 그린 20호 크기의 고인의 영정이 걸려 있었다.
조객들은 강단 앞에서 흰빛과 분홍색의 「카네이션」을 받아 유해 앞에 마련된 고인이 아껴온 U자형의 맑은 「크리스털」화병에 헌화했고 상주석엔 김총장을 비롯, 서은숙 재단 상무, 교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이날 아침 9시쯤 정총리도 빈소에 달려와 고인에게 헌화한 다음 묵념을 올리고 돌아갔으며 정오까지 김현옥서울시장, 국회의원 장준하씨 등 각계 인사 5백여명이 문상했다.

<박대통령이 조화>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11일 상오 고인의 빈소에 조화를 보냈다.

<학교 걱정으로 채워진 유언장>
유언장은 김옥길 총장·서은숙 재단 상무 등과 자리를 같이해 시종 화기마저 오가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유언장은 거의 학교 재단 및 관계했던 기관에 대한 걱정과 정리뿐.
유언장의 마지막 정리는 안양 「컨트리·클럽」으로부터 기증 받은 「클럽」뒷산 땅에 지은 조그만 한옥. 김 총장이 『그 집도 학교에 주시죠」하자 『저 욕심쟁이, 그 집은 안돼. 어머님이 죽을 때 사람은 집 한간이라도 지녀야 된다고 하셨어!』이렇게 시종 웃음이 넘쳤다고 김옥길 총장은 눈물지었다.

<1등 수교 훈장 추서>
정부는 고 김활란 박사가 살아있을 때의 「유엔」대표 등과 교육에 바친 공에 비추어 1등 수교 훈장을 추서키로 했다.

<꽃·잔디의 만평 땅, 유택될 금란 동산>
고인이 묻힐 금란 동산은 평생의 친구 이정애 여사의 무덤자리로 꽃과 잔디가 아름다운 1만여평의 소공원을 꾸미고 주일마다 그 곳을 찾아 무언의 대화를 나누어 오던 곳이다.

<유산 모두 이화재단에>
김여사의 유산은 1월28일에 남긴 유서에 따라 일체가 이화여대의 재산으로 넘겨졌다.
유산 가운데 평소에 매만지던 골동품 1백여점과 보석반지 두어점 뿐. 이것은 김옥길 총장에게 마지막 선물로 주었다.
지금의 대신동 새집은 이대 재단 이사장 명의로 돼있다.

<임종 순간>
10일 밤 8시5분 이층 병실을 지키던 김영의 이대 음대 학장이 김옥길 총장을 불렀다. 곁에는 조카딸 김정옥 여사(동구여상 교장), 서은숙 이사, 주치의 윤해병씨 등이 앉아 있었다. 일동은 어떤 예감 속에 긴장, 잠시 침묵이 흘렀다.
8시15분 김총장이 2층에서 조용히 내려 왔다. 목멘 소리로 운명을 전했다. 잠시 후 오열하는 흐느낌이 방안에 물결쳤다. 소리내어 울지 말자고 말하던 김총장조차도 그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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