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내가 만난 「러셀」경|서울 문리대 김준섭 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버트런드·러셀」경은 1872년5월18일에 「앰벌리」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수상직을 지냈고, 부친도 정치가로 선생이요 친구이었던 「존·스튜어트·밀」의 사상에 공오하여 산아 제한법을 의회에 제안하려고 한데서 인기를 잃었다고 한다. 역대로 정치가요 귀족인 좋은 가정에 태어났으나 불행히 두 살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세 살 때에 아버지 마저 여의게 되어 「빅토리아」여왕이 하사한 조부모의 집으로 가서 자라게됐다.
열 한살 때에 「유클리드」기하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수학에 흥미를 가지게 됐다. 그가 「옥스퍼드」대학으로 가지 않고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칼리지」를 택한 것도 이곳이 수학에 있어 더욱 우세한 까닭이었다. 이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는데 졸업 때에는 철학자가 될 것인가 정치가가될 것인가 양자택일에 몹시 고민했다.
역대 정치가의 집안이요 후원자가 많아서 정치가로 성공하기는 쉬웠다. 그러나 심사 끝에 철학자의 길을 택했다. 이 방면의 업적이 인정되어 모교에서 논리학과 수학의 원리의 강사가 됐다.
그래서 순조롭게 학구생활을 해나갔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반전사상의 글을 씀으로써 1백「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아 차압을 당하여 장서를 많이 팔아 갚았다. 또한 반전논자로 몰려 대학에서도 쫓겨났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는 그를 교수로 초청했다.
그러나 여권을 내주지 않아 가지 못하고 정치 강연회를 열려고 했으나 군부의 명령으로 그것도 중지됐다. 이 강연 원고를 「트리뷰널」지에 발표하고 6개월의 징역언도를 받아 복역하게 됐는데 옥중에서 쓴 것이 유명한 『사리 철학서론』이다.
필자가 「러셀」경을 처음 만난 것은 1950년11윌 이었다. 그때에 「컬럼비아」대학에서 3일간 그의 강연이 있었다. 키가 크고 날씬하여 몸매는 있으나 얼굴이나 몸이 여위어서 위풍은 없게 보였다. 감정과 의지는 없고 지성만이 전신에 가득 찬 인상이었다. 석학인데다가 말을 잘하여 학술강연이 장시간 계속됐으나 피로한 줄을 몰랐다.
강연이 끝나면 질문을 받고 했는데 한번은 「네이겔」교수가 연역법과 귀납법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 추리하는 것이고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 추리하는 것으로 결국 동일한 것이라고 대답하자 반박을 받게 됐는데 궁지에 몰리자 「조크」로 응수하여 청중을 한바탕 웃김으로써 궁지를 모면한 광경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또한 강연도중에 「노벨」상 수상의 보고가 들어와 청중으로부터 우레 같은 박수를 받으며 미소로써 답하던 얼굴은 잊혀지지 않는다.
26년 후인 l944년에 다시 모교로 돌아가서 저술활동을 계속하여 단행본만도 거의 60권을 남겼다. 철학에 있어 대표저서로는 『사학원리론』『프린치피아·마테마티카』『의미와 진리의 탐구』『인간지식, 그 범위와 한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철학사상 길이 남을 업적은 다음의 세가지점을 들 수 있겠다.
①유형론으로써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여 논리를 확고한 지반 위에 세웠고 순수 사학을 논리학으로부터 연역할 수 있음을 밝힌 점.
②기술론으로써 논리적 문장을 철학의 대상으로 하여 불완전한 기호의 성질을 밝히고, 문법적 주어가 분석에 의하여 제거됨을 논함으로써 의미론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점.
③1914년이래 철학의 제방법과 과학의 제방법이 동일하다는 입장에서 철학을 과학으로서 확립하는데 공헌한 점.
그는 「프래그머티즘」을 비판하고 과학적 비판적 실재론의 입장에 서있었다.
철학적 업적 외에 사회 사상가로서 정치평론가로서의 업적은 생략하고 그의 전 생애를 그의 말로 표현하면 『사망에 대한 열망, 지식의 추구, 인류의 고통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동정』의 일생이었다.
그의 세계정부론 및 세계평화론이 실현되어 전 인류가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그의 영면을 충심으로 애도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