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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기상에서 본 섬 풍경-김찬삼 여행기<필리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만에서 향항으로 건너가 며칠 머무르는 동안 [필리핀]으로 갈 준비를 갖추느라고 동분서주해야 했다. 선편을 알아보니 [마닐라]에서 오는 배는 많으나 가는 배는 매우 드물었다. 어쩌다 있긴 하지만, 화물만 취급할 뿐 여객은 태워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한 나그네의 형편을 보아줄 것 같기도 하여 선박회사에 통 사정해 보았더니 역시 막무가내였다. 시인 [보들레르]는 교회의 뒷문으로 천국에 오르겠다고 했다는데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했으나 저쪽에서 들어주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딴 선편을 무턱대고 기다릴 수도 없을 뿐더러 [홍콩] 체재기간도 만료되어 가기에 할 수 없이 항공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정월 초하룻날 새벽 계덕 비행장에서 쌍발 [제트] 여객기에 올랐다. [히치하이크](도보 여행)를 즐기는 나에겐 항공기란 도시 생리에 맞지 않지만 이길 밖에는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이 여객기가 막 뜨려고 [엔진]을 돌리자마자 30여명이나 되는 여객들은 한결같이 십자를 긋는 것이었다. 여행 중의 안전을 빌기 위해서다. 여객기는 이윽고 하늘 높이 떠올랐다. 나는 이른바 평화친선순례를 위한 지도와 자석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창을 통하여 내려다보니 각국 인종이 들끓는 [홍콩]이 저만치 보이는가 싶더니 금방 푸른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말까한데 저 멀리 수평선에 [필리핀] 제도의 하나인 [루손]도가 나타나는가 하더니 어느새 미서전쟁이며 세계 제2차 대전의 싸움터로 이름 높은 [링가엔]만을 날고 있었다.
[동양의 진주]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섬들이 7천여 개나 모여서 이루어진 이른바 다도국가인 [필러핀]은 과연 남지나 해의 낙원이란 인상을 주었다. 이 [필리핀]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고스란히 하늘의 푸른 얼굴이 비친 거울인 듯 짙푸르기만 했다.
그리고 조직도처럼 내려다보이는 바다가운데의 이 섬은 격전지란 느낌이 없이 무구한 세계로만 보였으며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에덴] 같았다. 주검의 산을 이루었던 섬은 파란 숲으로 아름답게 덮여있고 전쟁화를 그리는 그림물감이라 할 붉은 피로 물들었던 근해는 더 없이 맑은 하늘빛 그대로였다.
이렇듯 강렬한 환상을 지니며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느새 여객기는 하계수도인 [바기오] 시를 왼쪽으로 끼고 남동쪽으로 날고 있었다. 숲으로 우거진 중부평원이 펼쳐지는데 겨울철 이어서 그런지 전원은 한산해 보였으며 야자수 아래 옹기종기 모인 시골집들은 옛이야기에 나오는 것과도 같았다는 밭은 경지정리가 꽤 잘 되어있는가 하면 도로도 잘 짜여있어 농업국다운 모습이었다. 어떤 시골의 상공을 지날 때 성당 건물들이 보이는데 [밀레]의 『만종』에 못지 않은 종교적인 전원 풍경이었다. 과연 [가톨릭]교의 전통을 지닌 동양 유일의 기독교국가 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여객기는 드디어 [마닐라]국제공항에 이르렀다. 이런 낯선 땅에서 아무도 나를 마중 나와 줄리 없지만, 나는 맨 먼저 내리면서 얼결에 손을 흔들었다. 함께 타고 온 여객들을 환영하는 가족이나 애인이나 또는 벗들인 듯한 여러 사람들이 서로 손을 흔들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연쇄반응이랄까, 저 [카뮈]의 소설『이방인』속의 주인공의 심리랄까, 이도 저도 아니면 [프랑켄슈타인]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내릴 수 없기 때문일까. 세계를 도장으로 혼자 쏘다니는 나의 모습은 분명 무엇엔가 홀린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는 이상 할이 만큼 벅찬 고독감 같은 것이 온몸을 휩쓰는 것 같았다. 부질없는 몽환 같은 상념은 사라지고 마치 [타이탄]과도 같이 힘이 솟구치는 것은 웬일일까. 그것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된 새로운 땅을 밟는 기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낯선 이 나라의 어진 사람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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